'바나나'는 죄가 없다. ⓒpexels 미술수업시간 "선생님 저 친구는 물감이 4개인데 저는 3개예요" 준비물을 공평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뿔싸' 실수하고 말았다.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일들이 왕왕생긴다. '공평'이라는 키워드에 민감한 편이지만 매의 눈의 가진 아이들을 피할 수 없다. 예민하거나 관찰력이 뛰어난 아이는 연필의 길이나 모양에 딴지를 걸고, 디자인이 다른 사인펜 뚜껑까지 잡아내며 다르다는 사실을 알린다. "정말 잘했어요"라고 칭찬하면 옆에 있는 아이는 "선생님 저는요?"라고 되묻는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끊임없이 '왜요?'라며 꼬리에 꼬리를 물며 자신이 지금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김없이 주지시켜준다. 그런 확인들이 확신이 들 때 아이들의 자아는 안정감을 가지며 높은 자존감을 완성해 나가데 보통 5~6세 아이들에게 많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냥 아무거나 써~'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래?'라고 넘어가선 안 된다. 다르다는 차이에서 느끼는 불공평과 차별은 단순하게 보일지라도 아이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로 귀결한다. '재료를 덜 준다는 것은 선생님이 나를 가치 없게 여기기 때문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정된 자아상을 정립하지 못한다면 작은 차이와 앞으로 겪을 크고 작은 불공평 속에서 자신을 가치 없고 무의미한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 '나는 가치 있다'는 신념
내가 7살 때 일이다. 당시 지척 지간에 큰 이모네가 살았다. 마당이 딸린 2층 저택이었고, 자가용이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이모부는 은행사 사장으로 늘 부자다운 기품이 넘쳤고, 여유가 있었지만 그에 반해 이모는 뺑덕어멈처럼 이욕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사촌 형과 나를 늘 차별적으로 대하며 무시했는데 그중에서도 뇌리에 가장 강하게 박혀 있는 기억이 바로 '바나나 사건'이다. 당시 바나나는 고급 과일의 대명사였다. 값비싼 터라 엄두도 못 냈고,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런 바나나가 이모집 식탁에 떡하니 있는 것이 아닌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안된다고 말했다.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주기 싫으면 안 주면 되는 것이지 내가 보는 앞에서 사촌 형에게 먹이는 것은 참 못난 심보였다. 바나나 하나로 위세를 부리고, 자괴감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새퉁스럽다. 후일 들은 이야기지만 사촌동생은 그 집에서 '컵라면 사건'을 겪었다고 한다.
바나나 사건으로 한 때 '나는 바나나보다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라는 바보 같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 내면의 심해에서 건져 올린 이상한 신념과 담판을 짓게 됐다. 바나나는 결국 무죄를 선고받았고, 나 또한 가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결단했다. 그를 계기로 나의 가치를 한 없이 낮아지게 만들었던 불공평한 경험과 세상의 모순들이 서서히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나의 가치를 서서히 회복했고, 오늘의 시간에 설 수 있었다.
내일모레 나이 사십 줄을 앞두고 마트 매대에 깔려있는 바나나를 볼 때마다 과일과 나의 가치를 재고 따진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실소가 흘러나온다. 어른이 된 내가 어릴 적 나에게 '아니야. 너는 바나나보다 못나지 않아'라고 말해주듯 아이들이 느끼는 불편한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나는 가치 있다'라는 신념은 '세상의 모든 것은 나에게 공평해야 해'라는 사고를 넘어서야 정립할 수 있다.
◇공평이라는 환상
첫째에게 미안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둘째를 더 사랑한다. ⓒ강점멘토 레오 부모로서 선생님으로서 나의 불공평에 항의하는 아이들에게 이실직고한다. 나는 공평을 지향하고, 노력할 뿐 공평할 수 없다고 말이다. 더불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고 알려준다. 불공평을 겪을 때 우리는 스스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줘야 한다. 공평과 나의 가치는 동의어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불공평과 모순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의 가치를 쌓아가는 것이다.
유난히도 다른 친구와 자신을 빈틈없이 관찰하고, 비교하는 연서(가명.7세)라는 아이를 만났다. 항상 옆 친구보다 더 잘하기 위해 주변을 경계하고, 자신의 작품에 손을 대는 것을 절대적으로 싫어하는 아이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확인하기 위해 타인보다 뛰어나야 하고, 친구보다 더 많은 관심과 칭찬을 받아야 직성이 풀린다.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 높은 집중력을 보인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며 발달하는 멋진 아이다. 어느 날 같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다른 반 친구의 작품에는 알록달록 예쁜 돌이 있었는데 왜 자신에게는 주지 않았냐며 울며 찾아왔다.
"작품을 만들다 보면 다양한 재료를 쓰기 때문에 친구들과 나의 작품이 다를 때가 많아. 선생님이 똑같이 완벽하게 재료를 줄 수 없어. 다른 친구 작품에 연서에게 없는 돌이 있다는 것이 연서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그리고 연서가 잘 관찰해보면 다른 친구들에게 없는 것이 너에게 있을 수도 있어"라고 말이다. 연서가 갖고 싶었던 예쁜 돌을 손에 쥐여주며 불공평한 상황에서도 연서의 가치는 변함이 없다는 신념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말해줬다. 연서는 친구들과 선생님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긍정적 신념을 만들며 안정적인 자아상을 확립하고 있다.
세상은 나에게 무조건 공평해야 한다는 신념은 튼튼한 자아를 만들어가는데 독이 된다. 불공평한 것이 불편하지만 그것이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공평을 이기는 자유
우리는 공평할 수 있을까? 특히, 형제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지배적이다. 엄마와 아빠 중 누구를 더 많이 닮았는지? 기질과 성향은 어떤지? 발달상황은 어떤지? 등 다양한 변수와 상황에 따라 공평함은 변덕스러운 날씨와 같다. 공평하기란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영역임을 깨닫게 된다. 부모의 애착이든 양육태도이든 어쨌건 세상을 받아들여 나가야 하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의 몫이다. 나의 바나나 사건과 같이 말도 안 되는 공식을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옷을 살 때 아이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강점멘토 레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비로소 '자유'를 줘야 한다.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현장에서 겪은 일이다. 크리스마스에는 1년 중 가장 큰 행사를 하는데 과도한 행정업무를 줄이기 위해 똑같은 선물을 일괄 배분하는 관행이 있었다. 당시 실무자는 아동복지기관에 MP3를 배분했는데 모델은 같지만 색깔이 달라 아이들 간에 분쟁을 만들었다. 이런 사례를 교훈 삼아 기업과 후원자에게 배정받은 예산을 책정하고, 갖고 싶은 것을 제출하도록 한 것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것을 받을지 설레지만 정작 본인이 갖고 싶은 것이 아니면 실망감 또한 크다. 그렇게 매년 공평이라는 기치를 버리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줬다. 업무를 하는데 곤욕을 치러야 했지만 행사 현장은 그야말로 흥분과 축제의 도가니였다.
미술수업을 할 때에도 종류가 많거나 공평하게 재료를 소분할 수 없다면 아이들에게 맡긴다. 스스로 재료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존중한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공평할 수 없다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인 존중과 수용
한 번은 제주도 돌하르방을 그리고 만드는 수업이 있었다. '여러분들 중에 제주도에 가본 친구가 있을까요?'라고 하자 동시에 모두 손을 들며 '가봤어요'라며 상기된 목소리로 자랑했다. 비행기를 타고 갔다는 아이, 배를 타고 갔다는 아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신나게 말했다. 급기야 미국에도 가봤다는 친구가 있었고, 나아가 우주에도 가봤다는 친구도 생겼다. 물고기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도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는데 물고기를 키운다며 자랑하는 아이들 사이에 '선생님 우리 집에는 상어도 키워요'라며 아쿠아리움의 장엄함을 설명하는 아이도 있었다. 동화책에서 막 튀어나온 상상력을 현실적으로 이야기하는 '자랑'속에는 '선생님! 저는 이 만큼 가치가 있는 사람이에요. 그렇죠?'라는 욕구가 있다. 그런 언행 속에서 아이들이 가진 원형을 목격한다. 우리는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고, 수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 안정적인 자아상은 그런 과정에서 오는 것이며 실존 경향성을 획득할 수 있는 원천이 될 것이다.
*위 칼럼은 베이비뉴스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강점멘토 레오(본명 문선종)은 아이들을 좋아해 대학시절 비영리민간단체(NPO)를 시작으로 사회복지법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이르기까지 지난 18년 동안 아동상담 및 교육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