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르바 Aug 28. 2022

주말부부 워킹맘의 시작.

 이걸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여유롭고 좋았던 육아휴직을 마치고, 신랑이 복직을 했다. 이제 세 아이는 온전히 내 몫이었다.


 신랑은 새 학교의 텃세를 이겨내려고 노력하느라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혹시 힘들었던 일을 나에게 털어놓으면 ‘그러게 공무원 공부나 하지. 왜 사립학교에 들어가서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거야. ‘ 이런 소리나 들을까 봐 아주 가끔 힘들다는 말을 할 뿐이었다. 하필이면 그 시기에 나는 학교에서 ‘교무’ 업무를 맡게 되었다. 힘들기로 소문이 난 학교라서 인기가 없다 보니 대부분 신규 선생님들로 채워졌고, 30~40대 적당한 연차이면서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제안을 듣고 고민을 많이 한 후 아무래도 주말부부이고 아이가 어려서 어렵겠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재차 부탁을 하시기에 잠을 못 자고 고민을 하다가 결국 교무 업무를 맡기로 했다. 아직 큰 아이가 7살, 작은 아이가 36개월, 막내가 16개월. 아래 두 아이는 연년생으로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을 때였다.


 내가 교사 생활 처음으로 교무를 맡게 된 시기는 가혹하게도 신랑이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하면서 맞벌이 주말부부가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렸던 것이다.


 시댁에서 아이들 육아를 도와주신다고 하지만, 유치원 등 하원을 도와주시는 것뿐이었다.


 대개 오후 5시 정도에 퇴근을 하면 바로 시댁에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놀이터에 나가 1시간 정도 놀아주었다. 막내는 아직 손이 많이 가는 16개월이라서 졸졸 따라다니며 놀아주어야 했다. 6시 정도에 집으로 돌아오면 목욕탕에 물을 받고 세 아이를 담가 놀게 했다. 막내는 어려서 작은 목욕통에 따로 두고 큰 아이들더러 잘 지켜보라고 했다. 그 사이에 저녁밥을 준비했다. 막내가 물에 혼자 있는 것이 불안해서 부엌과 욕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서둘러 저녁을 차려야 했다. 저녁밥을 다 차리고 나면 아이들을 마저 씻기고, 닦여서 옷을 입히고 저녁을 먹였다. 아직 제 손으로 떠먹지 못하는 아래 두 아이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밥을 먹으며 온갖 곳에 흘려놓았기 때문에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고 진을 빠지게 다 먹이고 나면 방을 닦아야 했다. 아이들의 엉망이 된 손과 발을 닦고, 방을 닦고, 아까 놀이터에서 놀고 왔던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저녁 먹은 것을 설거지하고 돌아서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놀아주어야 할 시간이다. 그 시기의 아이들은 왜 그리도 엄마를 부르면서 놀아달라고 하고,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지. 그렇게 9시 정도가 되면, 양치를 시키고 재울 준비를 했다. 이 모든 것이 세 아이에게 똑같이 반복되어야 했기에 이쯤이면 하루의 기운을 모두 잃고 녹초가 되었다. 잘 때면 세 아이는 내 곁에 각자 자리를 잡는데, 나는 팔이 두 개뿐인데 누군가는 내 팔을 베개 삼지 못하는 자가 나오고, 그럼 내 가랑이에 파고들거나 머리맡으로 가서 조금이라도 나와 닿으려 노력하며 한참을 울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중 하나가 먼저 잠이 들면 조용히 베개에 눕히고 아직 잠들지 않은 둘을 내 팔에 얹어 재웠다. ‘다들 잠든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나 볼까’할 때, 누구 하나가 “엄마, 어디가?”하고 부르면 그때의 섬뜩함이란. ‘어서 자라. 어서 제발 자주라. 엄마도 좀 쉬자.’ 그렇게 재우는 것도 한 시간 가량이 걸렸다. 피곤한 날이면 나도 같이 잠이 들곤 했는데,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내 자유시간이 날아갔구나. 왜 잠들었지. 오늘은 절대 같이 잠들지 않아야지.’


 아이들을 재우는 동안 같이 잠들지 않은 날에는 10시 정도에 일어나 세탁기의 세탁물을 건조기에 돌리고, 아이들이 어지러 놓은 장난감들을 정리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막내 아이가 어려서 내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려고 하면 늘 울면서 나를 보고 애타게 “엄마, 엄마” 했었다. 막내를 안고 음식물쓰레기를 들고나갈 수도 없었기에 아이들이 자는 시간이 유일하게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남은 집안일을 마치고 나면 이제 나의 업무를 할 차례였다. 나는 교무가 처음이었기에 중요도 있는 공문을 헤아릴 줄 몰라서 늘 보아야 할 공문도 많았고, 전년도 업무 파일을 보며 내가 지금 해야 할 업무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게 학교 일을 하거나, 일기를 쓰거나, 가끔은 공인중개사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야행성인 나는 그 밤 시간이 너무 좋아서 되도록 늦게까지 자고 싶지 않았기에 밤 1시나 2시에 마지못해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도 곤욕이었다. 늘 아이들이 먼저 일어나 내 눈을 찌르거나 배에 갑자기 올라타면서 “엄마, 일어나. 아침이야.”하면 그제야 마지못해 일어났다. 잠을 아직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또 하루가 시작되다니. 아이들에게 간단히 누룽지를 끓여 먹이고 있다 보면 시어머니가 와서 둘째와 막내 아이 등원을 도와주셨고, 나는 첫째를 데리고 출근을 했다. 출근길에 있는 첫째의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출근하다 보면, 학교에 약간 지각을 하는 날도 있어서 아침이면 피곤함과 조급함이 불쾌하게 몰려왔다. 학교에서는 교무라는 어색한 옷을 입고 내 자리를 찾아가느라 긴장을 하고 있어야 했었다. 가끔 학교에서 업무에 많이 치이고 유난히 기운이 없는 날이면,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고 세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것이 진심으로 두렵고,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과 심한 압박감을 느꼈었다.


 그게 일반적이 나의 주중 일상이었다. 출근과 퇴근, 그리고 퇴근하면서 다시 집으로 출근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재우면서 육아 퇴근. ‘투잡을 뛰는 사람의 하루가 이렇겠구나’ 싶었다.


 그나마 그건 아무 일도 없을 때의 일상이었고, 이제 돌이 지난 막내가 자다가 돌연 일어나 울기라도 하면 달래서 재우느라 나의 잠은 반쪽이 되었고, 유난히도 토를 자주 하던 막내가 새벽에 일어나 우유를 달라고 울어서 먹였더니 기어이 토를 하는 날에는 새벽부터 이불 빨래를 하고 출근을 했으며, 셋 중 하나가 감기나 수족구 같은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그 예민함을 맞추려고 두 배로 애를 써야 했다. 출근하려고 하면 왜 똥은 그때서야 싸는 건지, 기저귀를 찬 어린 두 아이가 나란히 똥을 싸면 벗겨서 씻기고 다시 기저귀를 채워야 하니 나의 출근시간은 10분이나 20분이 미뤄졌고 조급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왜 루틴처럼 아침 8시면 똥을 싸는 거니. 너희들은! 나의 몸은 하나인데, 아이가 셋이다 보니 요구도 불만도 각양각색이었다.

 “엄마, 내 얘기 좀 들어보라고.”, “아니, 나 좀 보라고.”, “엄마, 막내 똥 쌌나 봐. 냄새나.”, “이거 읽어주기로 했잖아.”, “오늘은 놀이터 안 나가?”, “나도 안아줘. 나도.”, “이번엔 내 차례잖아. 나도 높이 올려주는 거 해 줘.”

 “엄마가 몸이 하난데, 어떻게 하라고 그러냐. 제발 순서를 기다려.” 해도 아이들은 나의 애달픈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았다. 배려는 없고 요구만 있는, 아직은 어린 아이들이니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운동을 좋아하고 체력이 좋은 편이라  정도 버틴다지만, 다른 직장 다니는 엄마들은 이걸 견딜  있을까, 다들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싶었다. 딱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막연히 어딘가에 있을 워킹맘을 생각하며 연대의식을 느끼고 위로를 받으려 했다. 정말 고달팠다. 그러다가 몸이라도 아픈 날에는 정말 지옥을 맛보았다. 아이들은 아프다고 누워있는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으니까 자꾸 일어나라고 셋이 우르르 침대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애들이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무섭다. 누가  대신 봐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얄팍하지만, 나는 ‘시부모님이 내가 자신의 아들이라면 직장에 다니면서 퇴근하고도 이렇게 세 아이를 혼자 돌보도록 뒀을까?’ 하고 생각했다. 주말이면 신랑은 나에게 좀 쉬라고 하며 세 아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올라가서 시부모님께 맡기고 잠을 자거나 누워있거나 함께 술을 마시곤 했으니까. 그런 얄팍한 생각을 할 때면, ‘그래. 남이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혼자 마음을 닫아갔다. 물론 시부모님이 육아를 도와주시는 것이 정말 감사하지만, 나 혼자 아이들을 돌보는 시간이 너무도 길었고 힘들었던 시기였다. 그때는 또 구렁텅이에 빠져서 우울해 했다. ‘내가 왜 이런 결혼을 해가지고. 겨우 100만원 벌어오는 신랑을 두고, 혼자 애 셋을 봐야 하다니. 내가 돈은 더 많이 버는데, 왜 이 고생은 다 하냐고.’ 하며 나의 결혼 생활의 역사를 훑게 되는 것이다. 제길!





작가의 이전글 육아휴직 - 같이라서 행복했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