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지의 목소리

by 순진한 앨리스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친 리원은 집을 나섰다.

아직 아침 해가 채 떠오르기 전, 출근길의 공기는 여느 때보다 상쾌했다.

몸의 컨디션도 이상하게 좋았다. 가볍고, 맑고, 어딘가 정돈된 느낌. 리원은 생각했다.

‘어제, 비록 신기한 꿈을 꿨지만… 몹처럼 잠을 잘 자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거구나.’

퇴근 5분 전, 리원의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6시 30분 정신과 방문’

리원이는 불면증으로 주기적으로 정신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양지의 정신과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6시 반 예약했던 이리원인데요.

오늘은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요. 다음에 다시 예약할게요.”

전화를 끊고, 리원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초라하고 작은 집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 생각에 그녀는 웃음이 났다.

그녀가 서두른 이유는 단 하나.

해바라기 그림을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본 그 소녀의 환한 미소 덕분에 리원은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회사에서도 상사에게 “오늘 일 잘했어요”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 감춰진 슬픈 눈빛이 라원이의 마음을 한켠을 쓰라리게.했다.


리원이 살고 있는 집은 오래된 연립주택 3층, 투룸 구조이다.

현관문을 열면 좁은 복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벽 한쪽엔 신발장이 있고, 그 위엔 오래된 우산과 장바구니가 걸려 있다. 바닥은 낡은 타일로 되어 있어, 비 오는 날엔 습기가 올라와 미끄럽다. 복도를 지나면 작은 거실이 나온다. 그곳은 리원이 식사도 하고, 책도 읽고, 가끔은 울기도 하는 공간이다.

벽 한쪽엔 오래된 책장이 있고, 작은 TV와 테이프로 감긴 리모컨, 해진 쿠션이 놓인 2인용 소파가 자리하고 있다. 거실 옆에는 작은 주방이 붙어 있다. 싱크대는 좁고, 조리대는 한 사람이 겨우 설 수 있을 정도. 냉장고는 반쪽 크기이고, 그 위엔 전자레인지와 커피포트가 나란히 놓여 있다.

창문은 있지만 빛이 잘 들지 않아, 늘 형광등을 켜야 한다. 그리고 거실 맞은편에는 두 개의 방이 있다

첫 번째 방은 리원이 매일 잠을 청하는 방이고 두 번째 방은 원래는 서재로 쓰려 했지만, 지금은 거의 창고처럼 쓰이고 있다. 박스와 계절 옷, 오래된 책들이 쌓여 있고, 한쪽엔 작은 접이식 책상이 있다.

리원이 가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꺼내어 보는 공간이기도 하다. 창문은 있지만, 커튼이 늘 닫혀 있어 어둡고 조용하다. 이 방은 리원이 아직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이 머무는 곳이다. 리원은 재빨리 복도와 거실을 지나 첫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장롱 문은 여전히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옆엔 해바라기 소녀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그림 액자를 조심스럽게 닦아낸 뒤, 침대 맞은편 벽에 정성스럽게 걸었다.

늦은 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었다.

리원이는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몸을 눕혔다. 스탠드 불빛 아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해바라기 소녀가 있었다. 뒤돌아선 채 어딘가를 바라보면서. 리원이는 속삭이듯 말했다.

“오늘도… 내 꿈 속에 나올 수 있어? 너가 너무 궁금해졌어. 너의 눈빛이 맘에 걸려.

그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당연한 침묵이었지만, 리원은 혼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엔 기대도, 체념도, 그리고 어딘가의 위로도 담겨 있었다. 그녀는 스탠드를 켜고, 이불을 살짝 끌어당겼다.

불빛은 방 안을 은은하게 감싸며, 그림 속 소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췄다.

리원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잠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뒤척이며 생각했다.

‘그래도… 저 작은 해바라기 소녀 덕분에 조금은 덜 외롭다.’

이리 저리 뒤척이던 그녀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해바라기 소녀가… 리원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그 소녀는 처음엔 따뜻한 미소를 보여 줬지만 곧 울것 같은 슬픈 표정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스탠드 불빛이 살짝 깜빡였고, 그림 속 소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안녕 언니. 난 해지야. 내가 누군지찿아줄 수 있어?”

리원은 숨을 멈췄다.

그 목소리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선명했고, 그 말은 머릿속 깊이 맴돌았다.

아침이 되었다.

해가 들기 시작한 방 안에서, 그림 속 작은 소녀는 다시 뒤를 돌아 보고 있었다.

하지만 리원은 어젯밤의 슬픈 눈빛과 의미심장한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몸은 가볍고 컨디션은 좋았지만, 마음 한켠엔 묘한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림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괜히… 미안해. 너한테 뭔가 더 물어봤어야 했는데.”


회사에 출근해서도 리원이는 그말을 계속 곱씹어 보았다.

내가 누군지 찾아 달라니...

순간 리원은 며칠 전 보았던 티비 프로그램이 생각 났다. 한을 품고 죽은 여자 귀신이 주인공 앞에 나타 나서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하소연 하는 장면. 그 소녀도 뭔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꺼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림속으로 들어와 나한테 밝혀 달라고. 현실성이 없는 얘기 같지만 어제의 일은 꿈이라고 치부하긴엔 뭔가 생생한 느낌을 받았다. 또 그 슬픈 눈빛 계속 리원리의 마음을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다시 늦은 밤 잘 시간. 리원이는 그림을 보고 말했다.

"오늘은 더 자세히 말해줘. 너의 표정이 왜이렇게 슬펐는지?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그리고 스탠드를 켜고 잠을 청했다. 그날도 뒤척임을 반복 하던 중 다시 그리 을 보았을때 역시 그림속 작은 소녀는 다시 리원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슬픈 표정을 하고 리원이를 바라 보며 말을 했다.

"언니. 나를 기다려줘서 고마워."

리원이는 오늘은 놀라지 않았다. 어느 순가 이 작은 소녀가 친 동생처럼 느껴 졌고 무섭거나 놀라는 마음이 없었다.

"안녕. 반가워 나는 리원이라고해."

"응 반가워 ."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어제 그 말 무슨 말이야? 내가 누군지 찾아 줄 수 있냐니?

"언니... 그건 내 입으로 말 할 수가 없어서.. 언니가 찾아줬으면 좋겠어.."

다시 아침이였다.

눈을 떠니 아침 해가 밝았다. 오늘 도 컨디션은 좋았다.

리원이는 하루종일 그말을 되새겨봤다..

내가 먼저 찾아주길 원한다?

“이 그림은 우리가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거실 구석에 놓여 있었어.

치우려고 했는데… 왠지 이 아이가 날 붙잡는 것 같았어. 그래서 놔두게 됐지.”

그림은 이 집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녀는 이 집과 어떤 인연이 있었던 걸까?

리원은 오래된 서랍을 뒤져, 이 집의 등기 서류와 과거 주소지를 확인했다. 그 때 리원이 이집 이사오기전에 살았던 한 가족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강해지. 2011년생.

경기도 성원구 ○○동 3-12번지.


리원은 숨을 멈췄다.

그 이름… 해지.

그림 속 소녀가 말했던 이름이었다.


리원은 그날 오후, 성원시 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조용했고, 오래된 책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그녀는 지역 자료실로 들어가, 최근 성원시 성원동 관련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펼친 건 지역 연감.

그 안엔 당시의 마을 지도와 주요 사건, 인물들이 간략히 정리되어 있었다.

리원이 살고 있는 주소를 중심으로 눈을 훑던 중, 작은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동 어린이 교통사고… 10세 여아 숨져”

2020년 6월, 성원구 ○○동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10세 강해지 양이 사망했다.

당시 강해지 양은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그게 정확한 팩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리원은 숨을 멈췄다.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다’는 문장.

그 말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사연이 있다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사 복사본을 손에 쥐고 조용히 그림 속 해지를 떠올렸다.

‘그날… 너는 도망치고 있었던 거구나. 정말 이 집에 살았던 거구나.’

그날 밤, 리원은 그림 앞에 앉아 조용히 속삭였다.

“해지야… 너의 이야기를 알게 됐어. 억울한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이 그림에 갇혀 있는 거구나.”

리원은 속으로 되뇌이며 그림 속 작은 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끝은 따뜻했지만, 그림은 여전히 차가웠다.

늦은 밤, 해바라기 소녀 해지는 오늘도 슬픈 표정을 짓고 리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슬픔, 억울함, 그리고…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시선. 리원은 그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아침이 밝았다. 햇살은 따뜻했고, 리원의 몸은 가벼웠다. 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내가 이 사건의 범인을 찾아주길 바라는 걸까?’

리원은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해지는 여전히 뒤돌아 말이 없었지만,그 뒷모습은 어딘가 더 간절해 보였다.

“그래… 조금이나마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리원은 결심했다. 이제는 해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진짜 진실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되는지 너무 난감 했다.


이전 01화1. 해바라기 소녀의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