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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 in Oct 22. 2023

콩과 콩나물

우리를 고개 숙이게 하는 것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라고 써놓고 보니 나는 매일 지하철을 탄다.








© liamburnettblue, 출처 Unsplash







오랜만에 먼거리를 지하철로 오갔다. 라고 써야지 사실관계에 맞겠다. 지하철을 타니 대학시절 매일 지옥철에 실려 다니던 시절이 생각났다. 수강신청에는 소질이 없어 단 한 번도 주4파(일주일에 4일만 학교에 가는 대학생)가 되어본 적이 없는 나는 결국 매일 학교에 출석을 해야했다. 주 5일을 2호선 지하철에 탑승했던 것이다. 그 땐 분명히 힘들었는데 그런 힘듦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이 안났다. 망각은 역시 선물이었던가!



그러나 이미 뇌리에 새겨진 고통은 아주 작은 트리거로 인해서도 쉽게 불러일으켜졌다. 



사람들은 노랗게 뜬 얼굴을 하고, 자신의 몸과 옷이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한채 어두운 터널에 '꽂혀' 이리저리 실려다녔다. '콩나물 시루 같다.'라는 관용구는 단순한 비유나 관용구가 아니다. 대도시 서울에 사는 직장인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적확한 표현이다.



아무리 콩나물이라도 처음부터 자신만의 줄기(사실 뿌리지만)를 뻗지는 않는다. 즉, 우리 모두는 작고 작은 '콩'이었다. '콩'으로부터 시작된 삶은 이러저리 구르다 자리를 잡고 어두운 곳에서 함께 물세례를 받으며 콩나물로 자란다. 이렇게 본다면, 콩은 성숙하기 전의, 성인이 되기 전의 인간이라면, 콩나물은 성인으로서 사회인으로 자리 잡은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 pkmfaris, 출처 Unsplash







콩은 완전하진 않지만 '구'형태를 띄고 있으므로 상황에 맞춰 이리저리 옮겨다닌다. 언제 어디서든 달리는 아이들과 같다. 반면, 콩나물은 자신이 붙박힌 곳에서 꼼작하지 못한다. 옆에 있는 콩나물을 보며 위안을 삼을 뿐이다. '나만 그런건 아니네.'







나만 그런건 아니네...






삶은 B와 D사이, C 라고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태어나고 birth 죽고 death 우리는 그 사이에서 수많은 선택 choice을 하며 살아간다. 선택은 적시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택하지 않는다고 그 선택지가 무한히 나를 위해 기다리주지는 않는다. 콩도 마찬가지다. 평생 콩으로 돌아다니려면 물에 젖으면 안된다. 몸이 무르게 되고, 나도 모르게 뿌리를 내려버릴테니. 다만, 콩나물로 살려면 몸을 푹 적셔야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야한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지만 콩나물도 그렇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다르다. 쌀알이 영근 머리가 무거워서 숙이는 벼와는 다르게, 콩나물은 빛이 없어 고개를 숙인다. 



콩나물을 만드는 콩은 대개 흰색이나 노란색 대두를 사용한다. 검은콩은 미관상 안 좋아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콩들로도 콩나물을 만들수는 있겠지만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콩나물에 대한 이미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노란머리와 흰 몸통을 가진 식물 같지 않는 식물. 콩나물은 그렇게 온전한 식물이 되지 못한다. 인간들을 위해 생육되고 소비되고 이를 반복한다.








© matzebob, 출처 Unsplash






무엇이 우리를 콩나물로 만드는가. 무엇이 우리를 고개 숙이게 하는가. 



삶이 그렇고, 사는 게 그렇다. 되도록 많은 인간들이 최소한의 권리만 누리며 번성하기에 최적인 장소인 도시. 그리고 이런 효율화가 초래한 비인간화가 고도화된 현대의 대도시. 서울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산업혁명 이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와서 빈곤과 굶주림, 역병으로 죽어갔을까. 



이 글은 도시 근로자들을 콩나물로 비하하고, 산업사회를 비판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와  농촌의 삶을 옹호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단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살게 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와, 사람을 사람답지 못하게 하는 사회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해 말할 뿐이다. 



나도 안다. 이렇게 장황한 그리고 비논리적인 글을 쓰고 다시금 태연히 콩나물 시루에 들어갈 것임을. 그리고 누구보다 튼튼하게 자라는 동시에 웃자라지 않아서 솎아내지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아둥바둥할 것임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이렇게 되새기는 것은 '의미'를 찾기 위해서이다. 







© dimitrisvetsikas1969, 출처 Pixabay






심리학자 빅터프랭클은 유대인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통해 삶에는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당연한 말 같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보다 '의미'를 생각하며 하루를 보내지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눈 앞의 행복(쾌락)이다. 다만 이런 쾌락이나 행복들은 연약하다. 죽음이 다가온 이들에게 쾌락이나 쾌락의 도구인 돈은 큰 의미가 없다. 빅터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심리학자인 그가 '의미'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삶의 조건에 굴복하기 얼마나 쉬운가. 또 그 조건이 주는대로 살아가기 얼마나 쉬운가. 비인간화된 공간에서 인간 이하로 살아가기는 얼마나 수월한가. 



그래서 선택하라!


콩이냐, 콩나물이냐. 콩이라고 항상 의미롭지 않다. 콩나물이라고 해서 항상 조건에 종속된 것만은 아니다. 그 안에서 행복이 있을 것이며, 그 안에서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인간인가. MBTI나 ABO식 혈액형으로 알 수 없는 나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알 필요가 있다. 스티브 잡스나 봉준호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대학에 다녀서 얻을 게 없음을 알았고, 자신이 회사원이 되어서 행복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반면에, 김철수나 김영희는 자신이 대학에 가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아 대학에 갔고, 남들 다하는 취업이 정답인줄만 알고 취직을 했다. 나는 철수인가 영희인가.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








© bdchu614,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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