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존버'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한국 사회는 존버 그 자체라고 느껴질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요즘의 MZ들은 '버티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고 한다. 몇 년 사이 이렇게까지 정서가 달라졌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버티는 건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나를 사랑하고 내 마음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는 정서가 확산되면서 나를 불행하게 하는 외부의 환경들과 빠르게 멀어지겠다는 태도인 것 같다.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은 너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어째서 '버티지 않기'를 통해 이뤄지는 일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버틴다는 건 불합리한 것을 모른 척하거나 마땅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과는 다르지 않나. 내가 원하지 않는 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면 그만두는 게 맞지만, 아직 모든 게 낯설고 서툰 기간에는 그걸 판단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모든 일에는 처음이 있고 신입과 신인이라는 시절이 있다. 하물며 신입도 신인도 아닌 지망생 시절도 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속상함, 나의 재능에 대한 의심이 마음을 힘들게 하는 시절들. 이 때를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내가 이 이 길을 계속 갈지 말지를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 서툰 시절을 나를 미워하지 않고 통과하는 것, 그런 버팀이 필요하다. 그 이후의 버팀은 한 프로 게이머가 남긴 명언 '꺾이지 않는 마음'이나 전여빈 배우가 시상식에서 수상 소감으로 남겼던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에 가까운 일일 테고. 그때는 성공하지 못해도 불행해지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니까. 아무튼 이때나 저때나 버텨야 한다.
지금의 나는 성공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쉽게 지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냥 하다 보면 언젠간 뭐라도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인간이니 그냥 할 테지만, 오랫동안 그냥 하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싶다. 매년 영화 시상식을 볼 때마다 그런 마음들을 배운다. 올해도 청룡영화상을 보며 어둡고 긴 터널을 묵묵히 지나온 사람들의 여정을 훔쳐 봤다. 어렵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려주는 고마운 사람들.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무사히 지나 보내고, 빛이 들지 않는 터널을 오래도록 지나고 있어도 뒤돌아 가지 않고 계속 가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부서지고 무너지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 당장 기깔나는 가사를 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나는 요즘 자주 실망한다. 평생 자기애를 갖고 공부하고 일해 온 인간이라서 더 그렇다. 늘 웬만한 건 평균 이상으로 해낼 수 있다는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근데 사실 그 바탕에는 내가 못할 것 같은 일은 애초에 거들떠 보지도 않는 일종의 메타 인지적 선택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만 인생이 흘러갈 수는 없다는 걸 안다. 게다가 판단 미스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하다. 작사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보다 빨리 깨달아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성실이라는 무기가 있다. 그건 내가 가진 성정 중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성정이다. 그러니 비록 내 시안은 탈락하고 까이고 꺾이고 또 꺾여도 마음만은 꺾이지 않도록 하자. 혹시 어느 날 마음이 꺾여도 그냥 해 보자. 이 서툰 시기를 잘 버티며 지나가 보자.
나는 여전히 '존버'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