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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떨어졌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by 하다메

지금은 모두가 다 알고 좋아하는 배우들 중에 운 좋게 벼락 스타가 된 사람은 많지 않다. 연극으로 시작해 숱한 오디션을 보고 긴 무명과 조연 시절을 거쳐 차근차근 주연급으로 성장한 배우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아마 그렇게 오랜 시간 자신의 길을 다져온 배우들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이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 건, '오디션'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이들에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백 번을 떨어져봤단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 심정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한 번은 떨어지고 한 번은 붙고, 또 한 번은 떨어지고 다시 붙고 그런 패턴이었다면 할 만했겠지만 그럴 리가. 열 번은 떨어진 뒤에야 아주 작은 역할 하나 얻었을지 모르겠다. 떨어질 기회조차 자주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탈락과 또 다른 탈락 사이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과가 없는 일을 반복하는 일은 보통의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셀 수 없이 오디션에 떨어진 경험이 있던 톱 배우가 했던 얘기가 한동안 기억에 남았었다. 그의 워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에게 남은 이야기는 이렇다. 그저 그 배역에 딱 맞는 배우가 아니었을 뿐이고, 나보다 더 잘 어울리는 배우가 있었을 뿐인데, 아무도 왜 떨어졌는지 말해주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을 의심하며 지쳐가는 것뿐이라고. 그러니 그러지 말라고.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하다 보면 '나는 안 되나 보다', '나한테는 재능이 없나', '이제 포기해야 하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내 연기는 너무 좋았지만 제작사가 찾던 이미지와 조금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제작자들의 의견이 팽팽하게 갈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논의했던 최종 2인 중 1명이 나였을 수도 있고, 이번 배역엔 더 적임자가 있어 떨어뜨렸지만 누군가의 눈엔 너무 마음에 들어 다음에 꼭 함께하고 싶다고 마음 먹게 한 배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정들은 나한테까지 닿지 않는다.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게 탈락한 자에게 이유와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오디션이란 그런 거다. 그러니 매 무대를 보고 심사위원이 심사평을 해주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얼마나 친절하냔 말이다.




작사는 레이블과 불특정다수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한 업무 구조를 갖고 있다. 프로젝트는 일 대 다수 형식으로 진행되고, 소통은 일방적이다. 협업할 업체를 과정을 거쳐 선별한 뒤에,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가는 여타 다른 업무들과는 좀 다르다. 물론 저 위의 프로 세계에서는 비슷한 형식의 업무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1:1인 경우는 별로 없다. 쉽게 말하면 선정과 작업의 커다란 두 단계의 일이 동시에 진행된다고나 할까. 그렇게 불특정다수 중 누군가가 이번 프로젝트의 협업인으로 선정된다면, 그 외 나머지 사람들과의 관계는 자연스레 없던 게 된다. 아니 애초에 맺어진 적이 없겠지만. 그리고 나는 늘 그 불특정다수에 속한다. 그리고 매일 떨어지는 기분으로 산다.


계속 시안 작업을 하지만 어떤 이유로 내 시안이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게 작사가들이다. 이건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도, 전업으로 일하는 프로 작사가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다. 내 시안이 완성도가 떨어졌나? 제목을 잘못 지었나? 내가 아티스트 분석을 잘못했나? 너무 평이한 가사였나? 너무 컨셉추얼한 표현을 써서 부담스러웠나? 스스로 계속 생각한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으니까. 이 생각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보면 어떻게 될까. 이런 구체적인 실망과 후회들은 '내 가사가 별론가?', '내가 재능이 없나?', '이제 그만해야 하나?'로 이어질 게 분명하다. 요즘 나에겐 그걸 경계하며 사는 것이 가장 큰 숙제다.


격주로 학원에서 합평 같은 피드백 수업을 하는데, 그때 받은 피드백들을 바탕으로 탈락한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내 시안이 안 된 이유는 생각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피드백 수업을 진행하고 나면 '왜?' 라는 억울한 생각이 쏙 들어간다. 그럴 만했다는 인정이 일단 되고 나면 '다음엔 잘 쓰진 못해도 이번에 받은 피드백만은 반영해야지' 라는 다짐이 생긴다. 수치를 무릅쓰고 소설과 시를,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들이 합평을 하는 이유를 이제서야 알았다. 나는 대학 시절 합평이 너무 싫어 창작 수업도 듣지 않았고, 비슷한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았다. 바보였다. 잠깐의 수치는 돈 주고도 사기 어려운, 아무도 말해 주지 않는 내 탈락의 이유를 알려 주는 유일하고도 값비싼 조언의 대가로는 무척 저렴한 편이었던 거다.


최근에 신인 작사가들의 인터뷰들을 보다, 일단 작업을 해서 내야 안 되더라도 나중에 발매된 곡과 내 가사를 비교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작업을 해 보려 한다는 얘기를 봤다. 내 시안의 장점도 단점도 스스로 연구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애티튜드가 없다고 생각한다.


작사 학원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학원에는 레이블에 전달할 시안을 선별하는 필터링 제도가 있을 텐데, 수강생들이 내는 모든 시안을 가사를 의뢰한 레이블에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쩌면 당연한 제도일지도 모른다. 그 필터링의 벽을 넘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게 문제인데, 제일 답답했던 건 '그러니까 제 시안이 레이블에 전달되지 않은 이유를 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라는 말을 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 아주 조금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지금은 그럴 만했던 이유를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시안을 보는 눈을 길러가고 있는 중이다.


살면서, 도전하면서, 내 노력이 보상받지 못했을 때 누구든 이유가 듣고 싶을 거다. 기업 면접에서 떨어진 취업 준비생도, 집앞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못 된 사람도, 아이돌을 준비하는 연습생도, 배우 지망생도, 브런치에 열심히 글을 쓰고 브런치 대상에 응모한 수많은 작가님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고 나에게 할애할 시간이 없다. 단편적인 기준이 확대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매번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사정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 매일같이 '왜 떨어졌는지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라도 억울해 하지 말자. 그 답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이, 나를 성장시킨다는 자명한 사실만을 기억하자.


괜찮다. 내게는 내 시안을 공들여 봐주는 수강생 동기들과 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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