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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다메 Nov 17. 2024

작사마저도 영어 능통자 우대라니


지난 내 삶의 궤적을 한번 볼까.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학교 부설연구소 국어 사전 편찬실에서 몇 년 동안 사전 편찬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전 만들 때 정도의 지식은 사실 이제 거의 휘발되고 없지만 나름대로 상황에 적합한 단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간으로는 자랐다. 별다른 취미 생활이라고는 없는 내게 거의 유일한 유희는 소설 읽기와 소설가 흠모하기. 그리고 지금 나는 생계를 위해 매일 줄글을 쓰는 직업인이다.

그 안에 영어는 단 한 톨도, 없다.


대학 시절 내 꿈은 한량이었고 취업 활동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스펙을 쌓기 위한 영어 공부도 하지 않았다. 난 국문학도인데.. 학교 졸업 필수 요건으로 일정 점수 이상의 토익 점수가 필요하다고 했다. 토익 시험을 본 적 없는 나는 수료생 나부랭이로 계속 남아 있다가, 입학 10년째가 되던 해, 이번에 졸업 못 하면 1학년부터 다시 다니는 '제적'이란 무시무시한 처분이 내려진다는 학사지원부의 전화를 받고 한 달 벼락치기를 해 토익 시험을 치렀다. 그리고 한 달 간 친하게 지낸 영어는 다시 내 인생에서 꺼져주었다.


이후 직업인으로 사는 데에도 영어는 내게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아 마음 편히 영어 무식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올해 3월, 혼자 일주일 동안 떠났던 태국 여행에서 만난 인도 친구들과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고 있는데, 도무지 소통이 자유롭지 않아 이제는 정말 영어 회화 공부를 해야겠다는 마음만, 그래 그런 마음만 매일 먹고 있던 인생이었다. 매일 영어 습관을 길러 준다는 스픽이라는 어플을 잠시 사용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발목이 잡힐 줄이야. 한글만 가지고 가사를 쓸 수 있던 시대는 김도훈과 박진영표 발라드 시절이 마지막이었을까. 글로벌 팬들을 타깃으로 한 아티스트가 부르는, 글로벌 팬들을 위한 곡을 쓰는 처지에 '저 혹시.. 영어도 꼭 써야 할까요?' 라는 순진무구한 물음을 던져도 될까? 그 정도로 양심 없어도 될까? 아니 뭐.. SS501의 '암욜맨' 정도의 영어 정도는 어떻게 비벼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로는 안 될까?


예전엔 영어 표현에 음악적 허용 같은 게 조금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부자연스러운 영어나 (콩글리쉬랄까) 올바른 문법이 아닌 영어는 가사에 넣기 어렵다. 실제로 영어 사용자들이 듣는 노래가 됐으니까. 한국 사람만 듣던 한국 노래에 섞인 영어가 아니게 됐으니까. 심지어 어린 친구들이 자주 사용하는 일상적인 영어를, 적절하게, 멜로디에 맞게, 발음에 맞게, 그리고 힙하게 써내는 건 내게 정말로 250 정도 레벨의 퀘스트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의뢰 메일에 '올바른 영어 표현을 사용해 달라'는 말이나 '해외 타깃 아티스트니 영어 비중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섞여 있으면 난 과감하게 작업을 포기한다. 이 얼마나 찌질하고도 메타 인지가 뛰어난 인간인가. 하지만 이건 내가 프로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일 거다. 프로에겐 허용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안다면, 프로가 되고 싶은 나는 지금부터 저 벽에 부딪치고 저 벽을 넘어야 한다. 일평생 숙제였지만 늘 뒤통수에만 두고 모른 척했던 영어라는 벽. (영어의 벽에 부딪힌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올드하게 느껴지는 기분인데.. 요즘 젊은이들 중에도 영어가 숙제인 애들.. 있겠지..?)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긴 한데, 요즘 아이돌 노래를 들으면 뭔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 듣겠는 이유가 한글도 마치 영어처럼 들리게 불러서 라고 생각한다. 모든 가사가 한글로만 된 댄스곡을 들어도, 어떤 부분은 잘 들리고 어떤 부분은 뭐래는겨 하고 흘러가는 부분이 있다. 굳이 안 들리는 부분의 가사를 찾아서 듣지 않고 흥얼거리며 즐기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해외 팬들이 한글 반, 영어 반으로 된 노래를 들었을 때 그런 비슷한 느낌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글로 된 부분이 갑자기 정말 남의 언어처럼 들리는 게 아니라 흘려 말한 그냥 어떤 영어로 된 말이겠지.. 하고 인식해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


그러니까 이 시대 노래 가사들에 영어가 덜 중요해지는 순간은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세계관이 다시 다 사라지는 시절은 어쩌면 올지도 모른다. 그런 희망을 난 계속 가지고 산다. 하지만 영어의 비중이 줄어드는 시절은 어쩌면이고 자시고 오지 않을 거다. 그러니 이번 건은 헛된 희망을 걸어볼 순 없고 내가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돈 주고 영어까지 배우기엔 무리인 것 같은데.. 이를 어쩐담. 아무튼 이런 다짐 박제 글을 썼으니 당장 오늘 저녁부터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하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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