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는 수능 성적 통지일이었다. 곧 원서 접수를 할 거고, 영겁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오겠지. 수능을 본 지 15년이 훌쩍 넘었기 때문에 일부러 기억을 되짚어 보지 않으면 쉽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수험생의 마음이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비슷한 형태이지 않을까. 어떤 결과든, 그게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조금만 더 늦게 알고 싶은 회피의 마음과 빨리 결과를 까 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한다. 내 경우 부정적인 결과를 통보받는 것보다 더욱 괴로운 건 기다리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결과를 모른 채 기대와 절망이 하루에도 열두 번씩 뒤바뀌며 널을 뛰는 기분이란 단연코, 최악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나는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부분 밖에서 하는 일들이었다. 너무 춥고 몸이 고단해서 불안이 나를 채울 새가 없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너무 괴로운 것이라 내가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야 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친구들을 만나 불안들을 유예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때때로 불안했지만 겉으로 티를 낸 적은 없던 것 같다. 친구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나는 언제나 이상할 정도로 태연하고 의연한 인간이었다.
비단 수능 때뿐만 아니라, 나는 나쁜 일을 겪을 때마다 정말 이상한 애로 보일 정도로 의연하게 굴었는데 호들갑 떠는 사람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성향 때문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불안에 잠재워지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그걸 이겨낼 방법을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 방법으로 '자꾸만 생각하지 않기' 라는 전략을 썼다. 학창 시절에 학교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했던 말은 '어디 있겠지 뭐. 못 찾으면 할 수 없지 뭐.' 그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잃어버린 핸드폰을 계속 생각하면 '내가 아까 왜 그랬지?' '분명 거기에..' '누가 훔쳐 간 거 아니야?' '엄마한테 뭐라고 하지?' '혹시 그 안에 남이 보면 안 되는 게 있나?' 같은 갖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힐 텐데, 나는 그게 너무 싫었다. 친구들이 나한테 '어떡해, 어떡해. 괜찮아? 찾을 수 있어!' 같은 말들을 쏟아내는 동안에도 나는 그냥 웃었다. 친구들이 대신 생각해 주니 나는 생각을 안 하기로 한지 오래였다. 그들은 나에게 어른스럽다고 했지만 나는 잃어버린 핸드폰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20대도 비슷한 행태로 지나왔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나와 가장 가깝던 사람들, 나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들이 왜 내 MBTI를 듣고 거짓말.. 이라고 했는지. 인간 F 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감정에 의존적이고, 모든 판단의 잣대가 감정에 치우져 있는 나에게 왜 모든 사람이 '너 T 아냐?' 라고 했는지. T처럼 보이는 F라니! 아주 만족스럽다. 이전 글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평정심 헌터라고. 의연한 인간 호소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아무튼 인간 F가 T처럼 보일 수 있었던 건 '생각하기를 멈추기' 전략이 먹혔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진짜 T는 인과관계를 궁리하느라 절대 생각을 멈추지 않겠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평정심을 잃는 일이 많아졌다. 커리어가 쌓이면서 인정욕구는 더 강해지고, 그에 반해 더 쉽게 실망한다. 평가받고 기다리는 일이 마음을 쉽게 지치게 한다. 그리 많이 나이를 먹지도 않았지만 '하.. 도대체 언제까지 평가받고 살아야 하는데..' 라는 어리광도 늘어난다. 반복된 담금질에, 흐물렁하고 녹아버린 채로 나 좀 그만 녹은 채로 내버려둬 주세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거든요.. 하고 싶은 날들이 있다.
프리랜서로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평균적으로 일 년에 한 번 정도 새로운 프로그램에 합류했는데, 다른 루트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지만, 내 경우는 대부분 이력서를 보내고 면접을 보는 식이었다. 별로 간절하지 않았던 자리도 면접을 보고 나면 간절해진다.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하지 않는 것과 내가 할 수 없는 건 다르니까. 작사를 한 뒤로는 면접까지도 가지 못하는 '서탈'을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서류 탈락이라니. 근데 탈락 통지를 하지 않는. 왜 떨어졌는지 안 알려주는 것보다 더 지독하다. 왜 떨어졌는지도 안 알려주고 떨어졌단 사실도 안 알려준다니!! 스스로 적당한 시기에 스리슬쩍 그런가 보다~ 하고 깨닫는 이상한 탈락. 작사는 내 시안을 보낼 수 있는 마감 기한이 정해져 있을 뿐, 정해진 발표 날은 없다. 당장 다음 날 결정해도, 다음 달까지 미루다 결정해도 그들 마음이다. 그리고 결과를 받는 건 '된 사람' 한정이다. 그러니 안 된 사람들은 안 된 건지, 아직 결정이 안 난 건지 알 길이 없다. 탈락보다 괴로운 기다림의 시간이 기약도 없이 반복된단 얘기다.
정해진 발표일을 기다리는 것도 힘이 드는데, 이런 걸 기다리다 보면 마음이 너덜너덜해질지도 모른다. 기다림의 시간에 갇혀 있으면 다음 스텝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 시간 안에서 나 혼자 기대하고 나 혼자 실망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엔 나를 의심하게 된다.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하려면 절대로 기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다. '생각하기를 멈추기' 전략이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업계의 많은 종사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시안을 내고 나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내고 나면 바로 잊어버리고 다음 시안을 작업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이미 낸 시안에 대해 계속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프로들도 그렇게 얘기하는데 내가 빗겨갈 재주는 없다.
주섬주섬 흩어진 자존감들을 주워 담고, 오늘도 계속할 힘을 잃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어제의 시안을 잊어버리려 노력 중이다. 평정심 헌터답게, 의연한 인간 호소인답게. 낸 것도 잊어버리고 있던 시안이 채택됐다는 연락을 받으면 기다리던 결과를 받는 것보다 몇 배는 더 기쁘지 않을까. 깜짝 선물은 언제나 설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