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를 배우기 시작하고 자주 고민이 됐던 건 이걸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지, 남 몰래 혼자 조용히 할지였다. 양쪽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뭐가 더 나에게 치명적인가, 그리고 뭐가 더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다.
일단 본업이 있는 사람으로서 다른 일에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는다는 건 긍정적으로 보일 가능성도 있지만 본업을 소홀히 하는 사람으로, 혹은 언젠가 이직하기 위해 탈주각을 재고 있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리스크가 있다. 더 치명적인 건 '걔 요즘 거기에 정신 팔려서 일을 열심히 안 해'와 같은 오해를 사는 건데 그건 그게 팩트든 아니든 언젠가 누군가에게는 분명히 들려 올 말이란 걱정이 있었다. 내가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도 본업에 쏟는 노력이 다른 동료들보다 훨씬 높다는 걸 생각하면 저런 얘길 듣게 되면 억울해 홧병으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함께. (이 업계에는 정말로 월루가 많거든요)
결론적으로 지금 내 주변 사람들 중엔 내가 작사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선 가족이 알고, 친한 친구들이 알고, 같은 업계의 동료들 몇몇이 알고, 인스타에 종종 티를 내기 때문에 나의 인스타그램을 구경하는 지인들이 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작사가 지망생으로 살고 있는 걸 알고 있는데, 처음엔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 얘기를 할지 말지 고민이 있았다. 대부분 공감할 만한 단순한 이유였다. 아주 오랫동안 도전했는데 결국 안 되면 좀 창피하니까. 이미 포기한지 오래인데, 누군가 잘 되어 가냐고 물으면 머쓱해지니까.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쉽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보면 열받으니까. 생각해 보니 모두 기분의 문제였다. 기분이 대수냐.
얘기했을 때 장점은 없을까. 얘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들을 역으로 활용하는 게 가능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내가 작사가 지망생인 걸 다 아는데 데뷔도 못 하면 창피하지 않겠어? 누가 언젠가 잘 되어 가냐고 물을 텐데 '아, 이제 안 해요' 라고 하면 쪽팔리지 않겠어? 라는 생각이 나를 포기하지 않게 이끌어주는 힘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던 거다. 결론적으로는 그게 정말로 큰 힘이 됐다. 게다가 능력만큼 인맥과 우연한 기회가 중요한 프리랜서 생활을 오래 해 온 나는, 뭐든 여기저기 소문내 두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온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프리랜서는 내가 누구를 혹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요즘 뭐에 관심이 있는지 최선을 다해서 소문내 둬야 하는 작자들이다. 생각보다 세상은 '나 친한 언니가 그런 거 좋아하는데 소개시켜 줄까?' '나 지인 중에 그런 사람 있는데 연락해 볼래?' 같은 과정으로 돌아간다.
이래 놓고 보니 얘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게 되었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요즘도 해?' '어떻게 됐어?' 같은 물음을 무해한 얼굴로 건네올 것이다. 머쓱하게 '네 뭐, 열심히 하고 있어요'라는 대답밖에 못 해도 그만 뒀다고 말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그리고 누가 물었을 때 소소하게라도 자랑할거리라도 있으려면 좀 더 열심히 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온라인 클래스에서 MVP 가사로 뽑혔을 때도, 다니는 학원에서 '이달의 작사가'로 뽑혔을 때도 인스타그램에 요란하게 자랑을 했다. 다음 자랑거리를 수집하기 위해 열심히 산다. 그러니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에게 오픈한 뒤로 이래저래 톡톡이 덕을 보고 있는 셈이다.
내 주변엔 정말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작가가 된 후배도, 회사를 열심히 다니면서 시나리오를 쓰는 친구도, 퇴근 후 집에서 웹소설을 쓰는 선배도 있다. 생각해 보면 나는 그래서 그들이 '뭐가 됐는지' 는 궁금하지가 않다. 늘 멋지다고만 생각했고 조금은 동경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래서 감독이 됐어? 그래서 영화가 나왔어? 그래서 공모전은 됐어? 그걸로 돈은 벌어? 그런 게 궁금했던 적이 정말로, 없었던 것 같다. 스스로에게도 그런 관대함을 가져주면 어떨까. 어쩌면 내 주변에도 퇴근하고 밤마다 가사를 쓰는 내가 뭘 해냈는지 궁금해하지 않으며 그저 멋지다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관대함으로 성취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그냥 하면 어떨까. 그냥 하는 것도 충분히 멋지지 않나.
저마다 사정과 상황이 다르겠지만, 지금 뭔가를 남 몰래 준비하거나 배우거나 도전하고 있다면 조금은 더 동네방네 소문을 내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고 권하고 싶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 멋져' '대단해' '나도 해볼까?' 같은 말들을 던진다. 그 말들이 또 생각보다 아주 큰 힘이 된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매일 나 스스로만 위로하고 응원하는 건 작고 부족하니까. 이렇게 여기저기서 작은 에너지를 모아 전투력을 얻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