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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지력 제로 인간의 미션임파서블

by 하다메


모든 시대의 노래들이 사랑 얘기를 하지만, 시대별로 가수들이 이야기하는 사랑은 다른 모양이다. 나는 아무래도 90년대 후반부터 2010년 이전까지의 대중가요 세대인데 그 시절 유행했던 곡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 전부라 이별 후 딱 죽을 만큼 아파하는 절절한 발라드와, 온통 유혹과 바람과 복수 얘기뿐인 댄스곡. 우리는 쿨의 이재훈이 그 방긋대는 잘생긴 얼굴과 빈틈없이 매끄러운 목소리로 '한 번 봤던 영화 또 보고' 타령을 할 때 그를 쓰레기라고 욕하지 않았다. 박지윤이 '포기해 그 앤 이제 너를 원하지 않아' 라며 뻔뻔한 바람녀 갑질을 할 때도 아무도 바람녀를 흉보지 않았다. 이후 아이돌 전성시대였던 2010년대에도 사실은 좀 부도덕하고 아찔한 노래들이 있었다.


지금 그런 노래를 낸다고 생각하니 누군가는 대국민 사과나 은퇴 선언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부터 든다. 하룻밤 상대를 찾아다니고, 다른 사람의 연인을 뺏고, 연인 몰래 양다리를 걸치며 스릴 있는 데이트를 하는 인간들은 오히려 늘어났음 늘어났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그러고 산다. 하지만 노랫말로는 어쩐지 금기시되어 버렸다.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힙합..


특히 10대와 20대 초반이 주 수요층인 케이팝 가사에 대한 자체 검열은 최상위 수준이다. 요즘은 상대를 'boy'나 'girl'이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도 조심스러워하고 꺼리는 분위기다. 상대를 특정 성별로 지칭하는 것 자체가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단 건 처음엔 별나라에서 온 얘기 같았다. 하물며 부도덕한 화자가 등장하는 가사, 꼰대력을 발산하는 가사, 젠더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소지가 요만큼이라도 있는 가사는 애초에 존재 자체가 재앙이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에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럼 요즘 노래들은 무슨 얘기를 하나. 잘하는데 심지어 즐기면서 일하는 나, 너무 매력적이라 모두가 쳐다보는 나, 정답이 아닌 나만의 길을 가는 나! 대단한 자기애의 시대가 왔다. 나 어릴 땐 스스로를 칭찬하거나 추켜세우거나 잘난 척하거나 매력을 숨기지 않고 내보이는 건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버튼 같은 거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달까. 지나치게 겸손을 강요하던 시대가 결코 옳았다는 건 아니고, 갑자기 이만큼 시대적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거다.


반면 사랑 노래들은 지나치게 무난해졌다. 좀 비뚫어진 사랑, 좀 변태적인 사랑 정도야 은유적으로 잘 포장해 쓸 수도 있겠지만 그 역시 수위 조절이 필요한데 포장하다 보면 결국 무난한 사랑 얘기다. 평범한 사랑, 보편적인 사랑밖에 이야기할 수 없다 보니 소재는 한정되어 있고 표현력의 싸움이 되었다. 가사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난이도가 훨씬 높아진 셈이다. 노래의 주제가 될 독특한 상황과 스토리가 설정되고 나면 남들과 다른 가사를 쓰는 게 조금 더 수월해진다. 그런데 그 기회가 막혀 버렸으니 이제는 캐릭터 설정에 공을 들이고 캐치한 표현들을 고민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매번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지 모르겠지만 문제는! 캐릭터와 표현이 거의 전부가 되어 버린 마당에, 젠지력이라는 미션이 같이 떨어졌다는 거다. 젠지가 공감할 만한 캐릭터를 설정하고 젠지들이 사용할 만한 일상적이면서 캐치한 표현을 요구하는 리드들이 쏟아지고 있다. 요구는 알겠는데 그래서요. 젠지들은 뭐에 공감하고 젠지들은 어떤 말을 쓰나요?


유튜브를 보고 쇼츠를 봐도 쉽게 캐치가 안 된다. 자녀들과 소통하고 싶지만 단단한 유리벽에 막혀 있는 부모님들의 심정이 이런 걸까. 요즘 애들은 뭐에 관심이 있고, 친구들이랑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고,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어떤 언어로 소통하는지 궁금한데.. 너무 궁금은 한데 이건 뭐 알아봐도 알아지지를 않는다. 내가 하는 추측들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바탕에 깔려 아무래도 정답에 가까워지지 못하는 것 같다. 환경도 가치관도 너무 많이 변해버려 '나 어릴 땐 어땠지?' 가 안 먹히는 거다.


얼마전 학원 수업 시간에 쌤이 해준 얘기가 꽤 인상 깊었는데, 어떤 수강생이 10대들이 공감할 만한 가사를 요구하는 리드에 맞춰 쓴 가사에 '청소 당번'이라는 표현을 썼단 거다. 귀여운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왜. 요즘엔 학교에 청소 당번이 없단다. 용역 업체에서 교실도 화장실도 복도도 다 청소해 준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학생들이 자기가 쓰는 교실을 스스로 청소하지 않는 교육 행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청소 당번'이라는 말은 어른들 기억 속에만 남은 옛말이 되었다는 거다. 비단 이 단어뿐일까. 우리가 학창 시절 사용하던 일상적인 단어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을 거다. 뭐가 남고 뭐가 사라졌는지 쉽게 예측하기도 어려울 만큼.


나도 저번주에 시안을 쓰면서 '여고생들이 쉬는 시간에 나눌 만한 대화 소재'를 찾아야 했는데 여고생들의 학교 브이로그를 아무리 봐도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두루뭉술한 내용을 써야 했다. 앞으로 30대 솔로 아티스트의 곡만 쓸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날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내 기억 속에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 테고,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새로운 10대들과 점점 더 멀어질 거다. 어디에서 젠지력을 얻을 수 있을까. 젠지처럼 생각하고 젠지처럼 행동하고 젠지처럼 말하려면 젠지들과 친하게 지내면 될까? 그들을 어디서 만나며, 그들이 나랑 놀아줄까? 젠지는 고사하고 엠지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가랑이가 찢어지는 중인데 나는 또 작사라는 행성에서 자아를 버린다. 작사는 또 '젠지 싫어, 젠지 몰라' 인간에게 새로운 바람을 심어준다. 하늘이시여, 제게 젠지력을 주세요.


이런저런 일들로 끊임없이 투덜거리고 있지만 그래도 나름 영어도 틈틈이 공부하고 있고 (요즘은 챗gpt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 공부도 가끔씩 하고 있는데 젠지 공부라니! 이건 확실히 막막하다.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두드리고 도전해 보는 시기니 공부하는 마음으로 끄적여 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내게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연차 지긋한 선배님들의 곡만 파게 되지 않을까.. 젠지들도 이모가 써주는 건 싫을 수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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