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단어들을 꺼내는 일
아티스트에게 영감이란 뭘까. 영감의 원천은 어디일까.
어릴 때부터 창의력을 밥 말아 먹은 나는 모든 교과목의 성적이 우수한 와중에 미술 실기평가에서는 D라는 처참한 성적을 받곤 했다. 미대를 보내달라고 엄빠한테 읍소하던 언니를 생각하면 둘 중 하나는 돌연변이였던 게 분명하다. 노래와 춤을 좋아했지만, 그건 흥에 가까웠고 음악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 소설을 사랑하게 됐지만 그때도 내가 소설을 쓴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문학을 놓지 않는다면 열심히 공부해서 평론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꿈을 잠시 꾸긴 했었다.
MBTI가 유행하기 전에는 나는 그냥 예술적 기질이 없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S와 N 논란을 정말 흥미롭게 지켜본 나는 내 버석한 창의력이 슈우우우퍼 대문자 S라는 성정에서 기인할 게 아닐까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상상력이 없다. 상상이란 행위를 잘 하지 않고, 누가 억지로 앉혀 놓고 상상해!! 상상하라고!! 떠올려 보라고!! 해도 데이터베이스가 아주 빈약한 AI처럼 나의 지난 세월의 경험들을 주섬주섬 떠올려 볼 뿐이다. 구성 작가로 10년째 일하다 보니, 주변에서 드라마 쓰는 일을 자주 권하는데, 정말로 난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에,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 것에 흥미도 없고 재능도 없다.
작사가의 정체는 뭘까. 음악이라는 범주로 묶인다는 점에선 예술가에 가까울까. 그렇다기엔 내가 느끼는 작사가는 기술직에 가깝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내 꿈을 펼치는 것보다는, 음악과 아티스트에 가장 어울리는 말들을 고민하고 찾아내는 사람들. 내가 작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면 늘고 노력하면 늘고 오래 하다 보면 느는, 그런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반짝거리고 통통 튀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술까지 연마한다면 나는 그들을 이겨낼 재간이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작사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는 다른 수강생들의 반짝반짝한 아이디어와 독특한 캐릭터들에 감탄하면서, (좀 못 썼더라도) 어떻게 이런 것들을 생각해냈지!! 이 사람.. 슈퍼 N이 분명해!! 하며 부러워 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테크닉이 상상력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어느 정도 생겼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런 사람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이 일을 할 때 나의 예술성은 얼마나 필요할까. 예술성은 뭐고 어디서 오는 걸까. 영감이 떠올라야, 영감을 찾아 다녀야 기깔나는 가사를 쓸 수 있을까. 한 유명한 작사가가 출연한 유튜브를 보다가 마음에 쏙 드는 답을 얻었다. 좋은 가사를 쓰기 위해 영화나 책을 보고 전시회를 다니고 하는 것들도 물론 좋지만, 인풋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아웃풋이 중요하단 얘기였다. 인풋은 이미 우리들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그것들을 어떻게 밖으로 꺼내서 표현할 것인지, 그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몇 해 전 [마음속의 단어들] 이라는 이름의 콘서트에 갔었다. 아주 오래 기다렸던 에피톤프로젝트의 단독 콘서트였다. 그날 차세정이 공연을 시작하면서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전했던 말들이 아주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았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마음속의 단어들을 잃어간다고 했다. 내가 어떤 단어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걸 지켜야 가치 있는 거라고 그랬던 것 같다. 그가 아주 오랫동안 나를 기다리게 한 것이.. 잃어버리는 중이었던 마음속의 단어들을 가만히 꺼내어 지켜내느라 조금 늦어졌던 거라고,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들로 돌아와 준 것이 고맙다고 생각했던 따뜻한 밤이었다.
내 안의 많은 감정들, 내가 경험한 숱한 사랑과 이별과 고민과 위로의 순간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나의 꿈, 나의 현재, 그리고 내가 가진 그리움 같은 것들. 그것들은 이미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한 번도 꺼내어 준 적 없어 저 아래 어딘가 켜켜이 쌓여 있을지도 모를 내가 가진 무수한 단어들을, 작사라는 일을 만나, 하나씩 꺼내어 준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낭만적인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낭만 마니아는 또 다시 작사란 이렇게 멋진 일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쿨하게 영감을 찾는 일에 목숨 걸지 않게 되었다. 아티스틱하지 못한 내 성정에 불만도 없어졌다. 영감은 이미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모여 있는 거였으니까.
모두들 마음속의 단어들을 가끔씩 하나씩 어떤 방식으로든 꺼내어 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