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의 동료가 되어라!
작사란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하나의 데모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 아마추어도 프로도 빗겨갈 수 없는 무한 경쟁 시스템이다. 당장 학원에서 얼굴을 맛대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이들은 가장 가까운 경쟁 상대들이다. 내가 다니는 학원 안에는 마주친 적 없는 수십, 수백 명의 라이벌이 있다. (다른 학원은 적대적 라이벌로 분류하겠다.ㅎ) 나에게 수업을 해주는 선생님도 나와 같은 곡을 두고 시안을 쓰는 사람.. 말하자면 상대가 안 되는 라이벌이다.
해마다 작사가가 되겠다고 작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늘어가고, 어떤 업계든 그렇지만 이미 자리잡은 고인물들은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갈수록 높아지는 경쟁률에 허덕이는 지망생들만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희한한 일이다. 함께 시안을 쓰는 작사가 지망생들끼리의 유대는 경쟁자보다는 동료의식에 가깝다. 내가 그들의 시안에 보내는 피드백들은, 지적하기 위함이나 과제를 위함이 아닌 조금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담긴 진심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다. 수업에서 도태되거나, 중간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게 옆에서 응원을 해주고 조금이라도 성취감을 느끼며 작업할 수 있도록 조언해주고 누구라도 빨리 좋은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마음들.
한국에서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어봤을 말, '동기 사랑 나라 사랑'. 나는 이 말을 구성작가 아카데미에서도 항상 들었는데 작가 10년 차가 된 지금도 아카데미 동기들은 내가 이 일을 덜 지치며 지속해 나갈 수 있는 아주 큰 힘이자 원동력이 되는 존재들이다. 막내 작가 시절엔 믿을 곳, 비빌 곳이라고는 서로밖에 없던 존재들. 사회인이 된 지 너무 오래라, 다시 새로운 동기들을 만날지 몰랐는데, 작사 동기가 생기고 말았다.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슬로건은 여전히 유효하다.
심지어 나는 주변에 작사를 배우다 그만뒀거나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주 적극적으로 복귀를 권한다. 할까 말까 고민하는 친구들에게도 끝없는 유혹을 한다. 경쟁자 늘리는 짓을 사서 하는 중이다. 기나긴 레이스를 혼자 달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다. 너.. 나의 동료가 되어라! 하는 날 위한 외침이다.
작사는 대중적이지 않은 분야라 직접 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의뢰가 들어오는 아티스트와 데모곡에 대한 정보는 절대적으로 보안이 지켜져야 하는 대외비 영역이라, 같은 의뢰 메일을 받지 않은 사람과는 얘기를 나눌 수 없는 구조다. 그러니 같은 학원 수강생과 선생님들하고만 내 작사 얘기를 할 수가 있다. 내일은 어떤 시안을 쓸 건지, 그 곡은 들어봤는지 어떤지, 이 리드가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뭘 써야 승산이 있을 것 같은지, 그런 작은 얘기들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어릴 때 너 숙제 했어? 너 문제 어디까지 풀었어? 라고 묻지 않고 지낸 사람들이 있나. 그건 염탐하고 경쟁하기 위함이 아닌 그저 물음일 뿐이었다. 하기 싫어서 하는 물음, 초조해서 하는 물음, 아무튼 그런 목적 없는 물음들이 마음 속의 불안을 잠재워주기 때문에 우리에겐 친구가 필요하다.
물론 학원에도,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독고다이로 생활하는 수강생들이 있다. 아마 성향 탓이겠지만 보통은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혼자 조용히 사라진다. 누구나 지치지만, 지칠 때 아무것도 아닌 한마디로 다시 할 힘이 나기도 하고 정말도 다 때려치우고 싶어 드러누우려는 순간에 누군가 멱살을 잡고 일으켜주기도 한다. 그럴 때 혼자라는 건 너무나 취약하다.
하다 못해 '이번주는 현생이 너무 바빠서 마감을 못했어요..' '저 이번 시안 쓰느라 너무 힘들었어요' '그거 너무 써보고 싶었는데.. 너무 몰릴 것 같아서 포기했어요' 같은 의미 없는 넋두리 같은 말들도 누군가와 나누고 나면, 그걸로써 털어버리고 새로운 시안으로 다시 새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란 참으로 희한한 동물이다. 인간은 또 어쩔 수 없는 질투의 화신들이라, 함께 공부하던 누군가 앞서가고 먼저 성공한다면 배가 아프겠지만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자극이 되고 동기부여가 될 거다. 그래서 동기들은 너무 소중하고, 미치도록 샤이한 우리 학원 작가님들에게 나는 오늘도 작게 말을 건넨다. 제발 모두들 그만 샤이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혼자서는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못 간다. 나는 멀리 멀리.. 아주 멀리 갈 것이다.
나랑 손 잡고 가는 그대들도 아마, 멀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