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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에 빠진 아날로그 인간

by 하다메


기술의 혜택을 누리고 살지 못하는 지독한 아날로그 인간. 아직도 사무실에서 출력물에 형광펜을 칠해 가며 일을 하고, 테이블링 어플 대신 워크인을 하고, 수기로 달력에 일정 정리를 하는 인간이 나다.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고 파파고의 결과값을 늘 의심하는 인간.


AI가 시나리오를 써준다는 얘기가 들리고, 요즘 대학생들은 챗GPT로 과제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너무 놀랍고 황당했지만 그래도 체감이 안 돼 나랑은 조금 먼 얘기라고 생각했다. 아이디어를 짜고 포맷과 구성을 만들고 대본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AI에게 위협당하는 우리의 일자리'를 주제로 한 주변 사람들의 논쟁을 본의 아니게 많이 듣기도 했다. 물론 이 논쟁은 주변에서 늘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챗GPT가 뭔데?' 하는 호기심 하나 없이 '응. 안 궁금하네..' '너네가 말해줘서 대충 뭔지 알겠어. 이제 알았으니 됐어.' 같은 시큰둥한 스탠스를 유지해 왔다. 시대착오적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누군가 나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게 아닐까.


나는 작사를 시작한 뒤에 평생 해보지 않은 것, 앞으로도 내 인생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고 있다. 마치 새로운 행성에서 새롭게 뿌리 내리고 사는 법을 터득해 나가는 외계 존재처럼. 작사는 결국 나를 챗GPT의 세계로까지 끌고 왔다. 처음 써보기 시작했던 건 한두 달 전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완전히 중독돼 시안을 쓸 때 항상 사이트를 열어두게 되었다. 사사건건 폭풍 질문을 한다.


'가사 좀 써줘', '제목 좀 지어줘' 같은 걸 하는 건 아니고..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 TOP1은 '이 영어 표현 맞아?'. 미취학 아동 수준의 영어 구사 실력을 가진 나는 사전을 뒤져 이런저런 단어들을 조합해 문장을 만든 뒤에는 꼭 이 녀석에게 확인을 받는다. 이 녀석은 맞다, 틀리다만 알려주는 게 아니고 틀렸을 땐 어떻게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되는지 대체 문장도 알려준다. 챗지피티 없이는 영어 가사를 아예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 슈퍼 의존적.


그 다음 많이 하는 질문은 '요즘 어린 애들은 이런 표현을 써?' 다... 상황에 따라 미국 애들은? 이라든가 한국 여고생들은? 이라는 디테일한 질문들이 추가되지만 아무튼 내가 쓰는 단어들이 겁나 촌스럽고 올드한 표현인지 확인할 길이 챗지피티밖에 없기 때문에 이 또한 매우 의존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 녀석에게 대답을 듣고 나야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가끔 데이터가 너무 없는 아티스트에 대한 가사를 쓸 땐 평소 이 아티스트는 어떤 성격이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묻기도 한다. 인터뷰를 찾아보고 유튜브 영상들을 공들여 보는 수고를 질문 하나로 퉁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 때도 있는데, 적절한 질문을 하고 답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도 효율적으로 일하는 노동의 한 방법일 뿐!! 이라는 생각으로 마인드세팅을 새로 하는 중이다. 뭐든지 발품 노동을 해야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노예 근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나는 늘 부족한 시간에 허덕이며 노동하는 타임푸어 아닌가!


최근에는 챗GPT의 또 다른 효용성을 찾아냈다. 방구석에서 혼자 일하면서 팀플을 하는 기분을 내는 것. 나 혼자 고민하고 나 혼자 일하고 나 혼자 검토하고 수정하는 일은 객관적으로 봐줄 누군가가 없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수정이 어렵고, 스스로의 부족한 결과물을 발전 없이 반복하고 자가복제하는 재앙을 불러오기 쉽기 때문에 항상 경계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작사가들은 다른 사람의 시안을 피드백하는 과정을 통해 내 시안을 스스로 피드백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중요시한다.


챗GPT랑 대화를 하다 보면 혼자 골방에서 삽질하고 있다는 기분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이런 키워드를 가지고 이런 내용을 풀어보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라고 묻고 '너무 좋아요!' 같은 답을 듣는.. 실질적으로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과정이지만,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들을 이 녀석에게 던지면서 사고를 확장하는 쉼표를 얻는 것, 그 정도의 역할을 열심히 부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 가사 이상하니?' 라고 피드백도 받아볼 수 있는 건가? 녀석의 주관적인 의견이 들어간 결과값을 신뢰할 리 없는 나로서는 그딴 게 가능하다고? 싶긴 하지만 오늘은 시안을 완성하고 나면 한번.. 녀석에게 보여줘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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