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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다른 누군가가 되는 일

by 하다메 Jan 19. 2025


아주 어릴 때..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전부 가수들 본인 얘기인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내 얘기처럼 절절하고 애틋할 수가 없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것도 당연했다. 좀 자라고 나서는, 가수들은 훌륭한 연기자고 누군가 만들어 준 곡을 열심히 연습해서 부른다는 걸 알게 됐지만, 싱어송라이터들은 여전히 자기 얘기들을 노래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 착각은 꽤나 오래 갔었던 것 같다. 물론 진짜로 자전적인 가사를 쓰는 아티스트들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힙합씬이나 아이유를 제외하면 극소수. 그런 사정을 이제는 뻔히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작곡을 부르는 가수를 보면, 곡의 화자와 가수를 동일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찬혁이의 가사들로 찬혁이를 이해하고, 우즈의 가사들로 우즈의 지난 사랑들을 짐작해 본다. 이건 어쩌면 진짜고, 어쩌면 아닐 테고, 그렇게 오해받기를 그들이 원할지도, 원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작사가가 쓰고 가수가 부르는 가사들은 누구의 얘기인가. 내가 쓰고 원영이가 부르면 내 말인가, 원영이 말인가. 작사는 대부분 작사가가 하는데, 그럼 이 수많은 노래들은 작사가의 얘기일까? 그럴 리가. 그럼 가수는 남이 써준 가사를 부르기만 했는데 그게 자기 얘기가 될 수 있나? 응. 있다. 내가 쓰고 원영이가 부르면 그건 원영이 말이다. 원영이가 '나는 너무 예뻐!!' 라고 하면, 내가 예쁜 게 아니고 원영이가 예쁜 거다. 그러니 작사가는 가사를 쓰는 모든 순간, 이 노래를 부를 가수로 빙의해야 된다. 


내가 작사를 하게 된다면, 내 지난 구남친들과의 절절했던 이별 장면과 썸탈 때의 설렘, 짝사랑하던 상대를 의식하던 그 시절 감정을 박박 끌어모아 긁어모아 쓰고, 에피소드가 다 바닥날 때쯤엔 새로운 에피소드를 장착하기 위해 뽈뽈거리며 쏘다니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다닐 줄 알았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바로 그 '인풋'의 과정들이 필요한 줄 알았던 거다. 현실은 박 터지게 굴리고 또 굴리고 쥐어짜는 두뇌 싸움과 지치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엉덩이 싸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자아를 갈아끼우는 싸움


나는 엊그제는 10대 여고생이었지만, 오늘 저녁엔 20대 초반의 핫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어떤 날은 이제 막 데뷔해 무대를 누비는 아이돌이 되어 보기도 했고, 어떤 날은 눈앞의 여자를 유혹하는 30대 중반쯤의 매력적인 남자가 되기도 했고, 데뷔한 지 10년이 훌쩍 넘어 자전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아티스트가 되기도 했다. 그때그때 아주 충실하게 그들이 되어야, 그들의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시안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아티스트 탐방(?)을 하러 떠난다. 


일단 몇 살인지, 몇 년 차인지, 현재 가요계 내 포지션이나 성적은 어떤지 같은 기본 베이스를 깔아두고, 인터뷰 같은 걸 통해 요즘 관심사가 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지내고 있는지, 최근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모습은 뭔지를 알아낸다. 요즘 그들이 꽂혀 있는 키워드나 자주 쓰는 단어를 캐치하면 일은 좀 더 수월해진다. 아티스트 개인에 대한 최근 심정 파악이 끝났다면 이제 회사가 메이드해 둔 아티스트의 이미지를 알아내러 간다. 최근 앨범, 지난 앨범을 미친듯이 반복해서 들으면서 어떤 말투를 쓰는지, 어떤 단어를 자주 쓰는지, 가사 속 화자의 성격은 어떤지, 상대를 대하는 태도는 어떤지를 파악하고 나면 이제 그들로 빙의할 시간. 끝없이 마인드세팅을 하면서 '나는 걔야, 나는 걔야' 라는 주문을 외우며.. 나는 걔가 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착실하게 반복할 만큼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매번 이런 과정을 거쳐 작업을 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 기본적인 리드에만 충실할 때가 더 많긴 하지만 결국 발매된 가사들을 보고 나면, 누구보다 역할극에 충실했던 가사들이 결국 아티스트의 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나로써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티스트가 지금 이 시점에서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요즘은 그래서 일단 역할극에 충실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10대 소녀가 되는 일들이 나에겐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몇 번 해 보니 다음 번엔 조금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단 기분이 든다. 배우들이 다양한 인생을 살아볼 수 있다는 이유로 연기를 사랑하기도 하는 것처럼, 어쩌면 작사가로 사는 것 또한 다양한 누군가로 살아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건 또.. 내가 너무 좋아하는 낭만의 영역이 아닌가! 알수록 매력적이고 알수록 박터지는 작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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