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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May 27. 2024

난 아직 쉬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간회고] ~5/27

화요일에는 클라이언트와 마지막(이 될뻔한?) 미팅이 있었다. 나에게도 우리 회사에게도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클라이언트였다. 이미 후임자에게 인수인계는 어느 정도 마쳐 놓았지만, 클라이언트에게 아직 나의 퇴사 소식을 알리기 전이었고 (그때만 해도 아직 퇴사일이 명확히 논의되지 않았고, 가장 빠르게 퇴사한다 해도 보름 정도 남은 상황이었으니) 아무튼 내가 단독적으로 무언가를 추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잠자코 있었다. 다만 그 사이에 또 갑작스럽게 클라이언트의 귀에 내 이야기가 들어갔던 것이다.

그들이 내 소식을 전해 들은 것과 별개로, 나는 내 나름대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준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실 머릿속으론 여전히 남은 실무를 어떻게 잘 처리해 놓고 나갈지만 생각 중이었어서, 정작 나의 마무리는 신경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5년 반 정도를 같이 일한 사이인데 (생각해 보니 단일 업무론 이건 내 역사에 가장 긴 시간이기도 했다)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이 업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음을 표현할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이 모든 일이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계속 생각 없이 속 편한 사람마냥 허허 웃기만 하다가 나왔다. 후회가 됐다.

퇴근하고 저녁에는 미리 신청해 둔 강연을 들으러 갔다. 앞으로 어떤 직무로 전환하게 되더라도, 아니 꼭 직무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잘 새겨들으면 좋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사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생각이 복잡할 때는 역시 걷는 게 최고라, 끝나고 잠깐 걷자던 것이 어쩌다 보니 지하철 역 3개 정도 거리를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수요일엔 보드게임 모임이 있었다. 생각해 보면 최근 많이 하는 게임들은 대부분이 전략 게임이다.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판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 수를 던지고, 상대가 어떻게 플레이를 할지 짐작을 하면서 한 수 한 수 의도를 가지고 진행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머릿속으로 정말 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한다. 가끔 머리가 아파서 시뮬레이션이고 뭐고 그냥 눈앞에 보이는 수를 쫓아가기 급급할 때도 많은데, 그러면 십중팔구 상대 패에 휘둘리게 된다. 문득, 이게 바로 지금의 내 꼬라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퇴사라는 카드를 던졌을 때 잠시 모든 주도권이 내게 온 것 같은 착각을 했다. 실제로 나에게 괜찮은 국면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그러나 막상 상대가 아무런 패도 보이지 않고 반응도 없자 나는 왜인지 내 전략까지 상실하고 만 것이다. 결국 이 마무리는 나를 위한 마무리인데, 나는 왜 똑같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의 탓만 하고 있던 것인지. 타임아웃 되기 전에 보채서라도 귀찮아하더라도 자꾸 상대의 말을 움직이게 했어야 했다는 또다시 한발 늦은 후회를 할 뿐이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말을 움직여본다. 아마 "같이 하실래요?"라는 동료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용기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늘 먼저 제안하기보다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도 되는지 망설이다 놓치는 편이었는데, 이젠 나도 그를 본받아 먼저 말해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묻는다. 퇴사하고 어디 가요? 한 달 살기 하러 가요? 여행 계획은 짰어요? 비행기 표 샀어요? 그때마다 난감한 것이, 나는 정말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실은 5월 초에 반납했던 라오스&태국 여행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짜서 다녀오려고 했지만 왠지 손가락이 안 움직인다. 아마 벌써 내 흥미에서 멀어진 모양이다. 대신 요즘 자꾸 찾아보는 것은 여러 종류의 글쓰기, 책 읽기, 편집툴 배우기, 기획에 대한 강의 등 뭔가 자꾸 공부해야 하는 것들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아직 난 쉬고 싶지 않구나. 생각해 보니 이미 벌려 놓은 일도, 새로 하고 싶은 일도 많아져서, 지금 나에게 일주일 휴가? 한 달 살기? 등의 단절과 떠남이 간절하지 않아 졌구나.

한 때, 떠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은 시절의 내가 있었다. (언젠가 이 브런치에 쓰다 완성하지 못한 남미 여행기처럼...!) 모두가 아직도 나를 보면 '여행하는 애', '늘 어딘가 다녀오는 애'를 떠올린다. 지금도 사실 떠나지 않으면 못 살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그 떠남의 방향이 좀 달라진 것 같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낯선 곳에서 흘러가는 바람에 나를 맡기는 쉼이 지금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이제는 돌아가는 판에 직접 뛰어들어 그 판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게임을 해보고 싶다. 퇴사일도, 퇴사 이후의 시간도 이렇게 멍하니 있다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게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오늘, 다시 한번 회사와 담판을 짓고 쇼핑도 잔뜩 했다. 다음 한 수를 위한 준비를 이제부터라도 해봐야겠다. 지더라도 힘껏 싸워보고 져야 아쉬움이 없다. 기왕에 이기면 더 좋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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