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제작기] 플레이어에서 크리에이터로2
기회는 생각보다 금방 찾아왔다. 언젠가 충무로 인근에서 자기 사무실을 운영한 적 있는 환 덕분이었다. 사무실을 운영하는 동안 친해져 인연을 이어오는 책방으로부터 공간을 활용하는 이벤트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마침 우리 모두가 재미있게 경험한 방탈출 또한 ‘과학책방 갈다’라는 책방에서 진행된 것이었으니 그 연결고리가 꽤 좋은 시너지가 될 것 같았다.
책방을 섭외한 환과 나, 수많은 방탈출 & 보드게임 경험이 있고 직접 만들어 본 적도 있는 은 셋이서 먼저 서점지기와 미팅을 가졌다. 갈다에서 방탈출 게임을 해본 지 겨우 한 달도 안 지났을 때였다.
알고 보니 책방은 이미 자체적으로 보드게임을 제작한 경험도 있는 곳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방탈출보다는 보드게임이 익숙하기도 하고, 개발도 그 쪽에 조금 더 흥미가 있었기에 책방에서 다루는 테마를 기반으로 한 다른 게임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책방은 같은 건물의 두 개 층을 책방과 살롱으로 운영하고 있었는데, 살롱 공간은 북토크 장소로도, 책방에서 진행하는 이런저런 소모임의 장소로도, 대관도 하는 등 다채롭게 활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방탈출 게임을 만든다면 바로 이곳을 활용하게 될 터였다.
책방과의 첫 미팅은 몇 가지 공통된 생각과 앞으로 정해야 할 것들을 확인한 자리였다.
첫 번째, 무엇보다 책방에서 다루는 테마를 바탕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새롭게 몰입하는 경험'을 선사하자는 것. 꼭 방탈출이 아니어도 되고 보드게임을 제작해도 되지만, 무엇이 되었든 이곳에 왔을 때 더 몰입해서 그것에 빠져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두 번째, 아무튼 그것이 방탈출이든 보드게임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스토리'라는 것. 결국 사람들을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의 첫 번째는 잘 만든 이야기일 테다. 방탈출의 게임구성 또한 스토리가 나온 다음에 진행해야 할 일이기에 우선 이야기를 짜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짜는 일은 내가 맡았다.
세 번째, 게임을 만드는 이유. 단지 재미만 추구하기보다는 의미를 담을 것. 사람들이 우리에 주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 수 있도록. 방탈출 게임을 하다 보면 시간 제약에 쫓겨 그 안에 숨어있는 스토리를 마음껏 감상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초조함과 탈출이 우선되는 방탈출보다는, 콘텐츠에 조금 더 깊숙이 빠져들어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에도 여운이 남는 게임을 만들어 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는 그밖에 기초적인 스토리라인이나 홍보 방식 등 이후 작업에 줄기가 될 몇 가지 이야기도 함께 나눴다. 아직 론칭도 안 한 게임의 주제나 장소를 이 글에서 먼저 언급하는 것을 피하려다 보니 조금 두루뭉술하게 정리되었지만, 바로 이날 첫 모임에서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이 꽤 구체적으로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번 미팅 때는 우리 팀 다섯 명 전체와 책방 사람들이 모두 함께 만나는 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물론 그 사이에 나는 어떤 이야기를 담은 게임을 만들지, 스토리를 보다 구체화하고.
아무튼 이게 된다고? 방탈출 게임을 진짜 만들 수 있다고? 나는 종종 무모하게 용감해지는 편인데, 대체로 무지할 때 그랬다.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얼마나 큰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서 말이다. 안개 자욱한 풍경 너머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대한 산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작은 봉우리만 생각하며 '별로 안 높네!'하고 덥석 발을 내딛였다. 그 첫 번째 봉우리를 시작으로 안개 너머에 얼마나 많고 깊은 굽이굽이 산길이 펼쳐져 있을지 생각도 안하고. 아무튼 때로는 그런 무지함 덕분에 내가 이만큼 나아갈 수 있던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그 길에 들어서고 나면 도중에 돌아가기보단 죽이 되더라도 어떻게든 끝까지 나아가긴 했으니까. 게다가 이번엔 같이 용감하게 등정에 나서주는 멤버들도 있지 않은가. 과학방탈출을 예매할 때 임시로 만들었던 카카오톡 단체방에서 (임시)라고 적어놨던 글자를 지웠다. 아무래도 이 방은 꽤 오래 유지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