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브레드와 함께 게임을

[게임제작기] 플레이어에서 크리에이터로 3

by 배짱없는 베짱이

12월에는 우리가 만들 게임의 스토리를 짜면서 방탈출게임 체험도 하러 다녔다. 사실 난 이전에도 몇 번의 방탈출 경험이 있지만 왜인지 보드게임만큼의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밀폐된 장소에 콘셉트를 충실히 구현한 소품들, 테이블 앞에 앉아서 머리만 굴리는 것이 아닌 온몸으로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구성, 눈앞에 모든 것이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힌트를 찾기 위한 레이더를 펼쳐야 하는 특징 등 퀴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 요소가 참 많은데도 마음이 동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 글을 쓰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보드게임과 방탈출게임의 가장 큰 차이라면 아무래도 '자유도'가 아닐까. 보드게임은 게임의 규칙이 있고, 우승이라는 목표가 있지만 그 규칙을 활용하는 방법과 목표를 향해 가는 길은 매번 달라지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젤다의 전설>과 같은 오픈월드 게임이랄까. 매번 규칙을 어떻게 변칙적으로 잘 활용하느냐도 게임의 새로운 묘미가 되곤 한다.

그에 반해 방탈출게임은 이미 만들어진 맵을 따라 목표 지점까지 안 죽고 이동하는 액션 플랫포머 게임, 그러니까 <슈퍼마리오> 같은 느낌이다. (물론 <슈퍼마리오>도 요즘에는 오픈월드 스타일로 나오기도 하는 것 같지만) 몰입감이나 설계는 보드게임에 비교할 수 없도록 정교하지만, 그 안에서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설계자가 이미 다 구축해 놓은 시나리오를 정해진 시간 내에 의도대로 풀어가며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이 주요 목표가 된다. 물론 갈수록 워낙 다양한 종류의 게임이 나오고 있어서 내가 접해보지 못한 다른 방탈출 게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유도가 높은 방탈출 게임은 또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만큼의 변수를 통제하는 것이 또 일이 될 테니까. 언젠가 보드게임을 책에 비유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정리하면서 보니 방탈출은 책보다는 영화에 더 가까운 듯하다. 모든 것을 이미 설계해 놓은 감독의 의도 아래 촘촘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거대한 예술물 같달까.


아무튼, 그런데 마침 영화관에서도 방탈출 게임이 운영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방탈출에는 심지어 진짜 배우까지 등장한다. 우리는 마치 한 편의 영화 속에 직접 들어간 주인공이 되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는 배우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나리오를 따라 탈출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 이 방탈출 게임의 이름은 <라이브시네마>. 멀티플렉스의 한 상영관이 통째로 게임의 무대가 되고 배우도 등장하는 만큼 가격대가 꽤 있음에도 워낙 인기가 많아서 예약 경쟁도 치열하단다. 마침 운 좋게도 한 타임을 예약할 수 있었고, 무려 월요일 밤 9시에 함께 모여 게임을 진행했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세트장, 원래부터 우리 친구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하게 해주는 배우, 화려한 조명과 사운드,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까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물론 이건 공부를 위해서라기 보다 그저 멤버들끼리 새로운 경험을 하며 놀고 싶어서 도전한 거에 가까웠다.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누가 어떻게 앞서 나가는지, 눈앞에 펼쳐진 문제를 푸는 데 어떻게 머리를 모아야 하는지, 서로를 조금 더 파악해 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가 만들려는 게임은 아예 또 성격이 다르다 보니 당장에 어떤 아이디어를 얻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요즘 사람들이 바라는 새로운 경험은 무엇인지, 게임(퀴즈)을 만드는 방식이나 장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도는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될 수 있었다.


한편 과학책방 갈다에서는 연말을 맞아 특별한 프로그램이 열렸다. 갈다 사이언스 미디어 페스티벌. 말하자면 과학 콘텐츠의 연말결산이랄까. 그중 눈에 들어오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과학방탈출게임 비하인드'. 일반적인 방탈출도 그렇지만 이렇게 콘셉트 명확한 방탈출의 기획은 어떻게 나오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실제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환과 함께 다녀왔다. 게임을 만든 사람들은 정말로 다 과학자들. 방탈출 경험은 없지만 워낙 퀴즈를 풀고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크리에이터 한 분이 '몰입해서 과학을 즐기게 하고 싶어서', 무엇보다 자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방탈출 콘텐츠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게 남았다. 너무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갈수록 직접 체험하며 몰입해 보는 콘텐츠가 경쟁력을 얻겠구나, 그럴려면 무엇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깊이, 잘 알아야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 나의 게임 스토리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엄청 쉽게 잘 해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흐름을 잡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여유가 꽤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틈틈이 생각의 파편을 굴려 나가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실마리가 잡히는 순간이 있기에, 생각이 조금 더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 사이에 우리 팀은 이름이 생겼다. 일단 모임이라면 이름이 있어야 지속가능해진다고 환이 말했던가.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을지 서로 머뭇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콘브레드'를 말했다. 갈다에서 과학방탈출 게임을 하던 날, 효자동에 있는 수의 집으로 놀러 가며 사 먹었던 효자동 베이커리의 대표 빵 이름이었다. 영어로 CORN BREAD. 줄여서 C.BRD. 이 줄임말은 보드게임 클럽(Club.BoaRDgame)이 되기도 하더라고 아주 훗날에 환이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해 줬다.

이름이 생기고 나니 뭔가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콘브레드가 나의 꽃이 되었다. 우리끼리 연말 송년 모임도 했다. 이름하여 '콘말파티'. 아직 게임 제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는 않았지만, 함께 보드게임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며 한 팀이 되기 위한 시간들을 보냈다. 사실 게임 제작은 다 핑계고, 이렇게 같이 모여 같은 주제로 즐거워할 사람들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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