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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짱없는 베짱이 Nov 27. 2018

40. 나는 파도를 기다리고 있어

2017.7.17. 만코라, 페루(D + 161)

"Estoy esperando las olas." 서핑을 배우는 동안 서핑보다 먼저 배운 말이다. 나는 파도를 기다리고 있어. 페루 북쪽의 작은 해안 마을인 완차코(huanchaco)도, 그보다 더 북쪽으로 에콰도르를 향하는 국경 가까이에 있는 마을인 만코라(Mancora)도 파도가 많거나 높거나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늘 서핑보드에 앉아서 파도를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이미 서핑에 익숙한 K에게야 아쉬운 일이었겠지만 그로 인해 이제야 막 서핑이라는 세계에 눈을 뜬 나에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다.




완차코는 알려진 서핑 스팟답게 파도가 좋다고 했지만 조금만 잘못하면 물 아래 자갈밭이 넓게 깔린 얕은 바다 쪽으로 휩쓸려 나가기가 쉬웠다. 안 그래도 물이 무서워 어떻게든 서핑보드 아래로 빠지고 싶지 않았던 나는, 차마 잡고 있던 손을 떼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발을 보드 바닥에도 붙이지 못한 채 보드를 껴안고 몸을 덜덜 떨다가 타이밍을 놓쳐선 힘이 빠져 해안가까지 쓸려오는 시간이 많았다.

이미 동남아에서 3개월 정도 서핑을 배워온 K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옷과 장비까지 대여를 해주고 심지어 강사와 수강생 1대 1 강습이라니. 이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라는 말에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놓치면 안 될 것만 같아 더욱 기를 쓰고 바다에 나갔다.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것 같기도 미끄러지는 것 같기도 하던 그 아찔한 기분은 잠시, 나는 온몸을 다해 바닷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다 보면 맨발 여기저기에 작은 생채기들이 생겨 따끔거렸다. 이내 지친 몸을 이끌고 뭍으로 나와 할 수 있는 일이란 멋지게 파도를 타는 K나 다른 서퍼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 내게 만코라의 바다가 다가왔다. 넓고 부드러운 모래사장은 아무리 바다에 빠져도 위험하지 않을 것 같고, 좋은 날씨 때문인지 물도 상대적으로 더 맑고 파래서 물 밖에서도 바닥까지 다 그대로 눈에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곳. 

뜨루히요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밤을 달려 만코라에 도착한 날, 아침부터 햇빛이 쨍하게 내리쬐었다. 조금 더 적도에 가까워져서일까, 한층 강렬해진 더위 아래 휴양지 같은 분위기도 더욱 무르익었다. 하얀 모래사장, 야자나무, 선배드와 파라솔, 그리고 밤이 되면 화려하게 변할 것이 분명한 해안가의 식당들. 이번에는 시간이 좀 걸리고 발품을 더 팔더라도 작정하고 좋은 숙소를 잡기로 했다. 이내 3층에 넓게 뚫린 테라스로는 바다가 가득 넘실거리고 아침이면 바로 모래사장이 이어지는 1층의 바에서 조식을 먹을 수 있는 숙소를 골랐다.



우리가 묵었던 숙소와 주변의 풍경들. 지금보니 파도는 없는데 온통 서핑하는 사람으로 가득하네 ㅎㅎ


숙소에서 걸어 나가면 1분도 채 안 걸리는 곳에 서핑샵이 있다. 숙소에서 테라스 너머로 물 때를 확인하고 내려가 40솔(한화로 1만 2천 원이 안 되는 가격)을 내면 대기하고 있던 여러 명의 강사 중 한 명이 서핑복과 보드를 챙겨 나온다. 나의 서핑 강사는 보통 마르코 아니면 레오. 만나면 서로의 이름을 먼저 알려주는 인사가 익숙한 곳이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마르코, 나는 수영을 할 줄 몰라. 보드가 있어 빠지지 않을 테니 걱정 마. 레오, 내가 넘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네 뒤에서 내가 늘 보드를 잡고 있으니 걱정 마. 우리는 바다 위에서 생각보다 꽤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다. 만코라에는 생각보다 파도가 없었고, 또 작았기 때문이다.

강습이 끝나면 어김없이 한 두 명의 낯선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아까 네가 서핑하는 모습을 찍은 게 있어. 이것 봐, 잘 나왔지? 원한다면 너에게 팔게. 원래 서핑하는 사람들이 많은 해안가에는 이렇게 죽치고 앉아서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돈을 버는 사람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러나 우리 동행 중 사진을 잘 찍는 R이 벌써 우리의 모습을 렌즈에 다 담고 있었다. 

해가 저물고 나면 해안가와 가까운 도로 쪽으로 불빛이 하나 둘 켜지면서 축제의 밤을 알려왔다. 근사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트립어드바이저 추천이 붙어 있는 술집에서, 숨은 고수의 은신처였는지 허름하지만 맛만은 최고였던 햄버거 가게에서 매일 밤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만코라에서의 나날들.



이곳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대부분 무언가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아침에 겨우 눈을 뜨면 1층으로 내려가 금방 나오지 않는 조식을 기다렸고, 바다를 바라보며 물이 들어오는 때를 기다렸다. 바다에 들어간 뒤에도 타기 좋은 파도가 올 때까지 또 기다렸고, 녹초가 되어 다시 뭍으로 나온 뒤엔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맛집과 처음 보는 맥주들을 찾아다니며 리마에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올라오기로 마음을 바꾸었다는 또 다른 동료 I를 기다렸다. I까지 모이고 나면 이제 국경을 넘어 에콰도르로 향하는 버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I가 리마에서 야간버스를 탔다던 그날, K와 R과 나는 만코라에서의 그리고 페루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등대가 있는 동네의 미라도르(전망대)에도 다녀왔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를 기다리고, 또 붉게 변한 하늘이 다시 그 색을 잃어갈 때까지 기다리다 하루가 저물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나는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하고야 말았다. 디데이까지는 보름 남짓. 정말 기다렸던 시간이면서도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랐던 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핑을 배우는 동안 중요한 것은 타이밍을 잡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가끔은 마르코나 레오가 정말 좋은 파도가 오니 준비하라고 해도 미처 몸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거나, 파도를 타고 가기 좋은 시작점을 놓치는 바람에 그대로 흘려보내야 했다.

처음이니까 그래, 내가 알려줄 테니 걱정 마, 그들은 늘 그렇게 나를 안심시켰고 우리는 또 바다에 하염없이 떠있으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 뒤에서 늘 날 밀어주고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까, 다행히도 몇 번은 짜릿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제대로 파도를 타고 가볼 수 있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시기를 정하는 일은 집을 떠나온 지 3개월쯤 되었을 때부터 조금 뒤로 미루어 놓았을 뿐 언젠가 결정을 내리고 실천해야만 할 과제였다. 내게 밀려온 파도는 체력이 다 된 몸이 보내온 신호였을 수도 있고, 두 번째 페루 땅을 밟으며 행복했던 마음만큼 또다시 안정을 취하고 싶어진 내 본심이 보내온 신호였을수도 있겠다. 누구한텐가 묻고, 누군가가 끌어주며, 아직은 좀 더 버텨도 돼 혹은 지금이 돌아갈 타이밍이야 그들처럼 말해주면 좋았겠지만 내 삶은 그 작은 서핑보드 위에 올려놓기엔 너무 무거웠는지도 모른다.



노을지는 만코라 등대에서 찍은 인생샷


다행히, 세상에 똑같은 파도는 하나도 없겠지만, 놓쳐버린 파도 위에 다시 올라설 순 없겠지만, 그래도 기다리고 있으면 파도는 또 왔다. 그리고 개중엔 분명 좋은 파도가 있었다.

어느새 1년 전, 여행을 하던 그때는 한두 번 파도를 놓친 일로 그렇게 힘들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후로 1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또다시 눈앞에 작은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좋은 파도, 쉬어갈 파도, 구분할 새도 없이 흔들린다. 놓칠까 봐.


그때 내가 조금 더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비단 그곳에서의 생활이, 그곳의 풍경이 여유로웠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냥, 언제부턴가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아버렸던 것뿐이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 기다린 뒤에야 돌아갈 결심을 했던 것처럼. 이제 와서 다시 그때를 떠올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타이밍을 잡는 것 만큼이나 기다리는 일도 필요하다는 것. 바다에 앉아 시선을 저 멀리에 두고 하염없이 파도를 기다리던 그날의 내가 조금 그리워진다. 심지어 그곳은 날씨도 참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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