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커피 이후의 것들
종종 본가에서 쉬는 날을 보낼 때면 동생과 출근길을 같이한다. 출근 시간에 맞춰 새벽같이 일어나 얼굴을 대강 닦아내고, 화장대에 나란히 앉아 초점 없이 화장품을 두드리다 보면, 둘 중 하나의 음성은 어김없이 적막한 새벽 공기를 가른다.
"아, 진짜 가기 싫다."
남겨진 쪽은 늘상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 친다.
"나도."
이를 신호탄으로 우리의 아침은 막을 올린다. 와 진짜 졸리다, 그니까. 어제 몇 시에 잤지? 아, 오늘은 뭐 입어. 내 말이 진짜 뭐 입어. 그러다 다시, 아 진짜 가기 싫다, 그니까.
짜여진 대본처럼 반복되는 오프닝이지만, 던져진 시름에 동정이나 위로를 건네기 보다 한 웅큼의 시름을 더해 데굴데굴 굴려주는 이가 있는 경우엔 꽤 재밌고 흥이 난다. 슬쩍 운만 흘려도 문장을 완벽히 완성해주는 무언의 동지와 총알을 장전하는 일은, 전투력 향상에 언제나 특약이기에.
차 시간을 몇 분 남기지 않은 채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잡아 타고 내려간다. 그리고 그 때 쯤에서야 비로서 완전히 떠진 눈을 거울에 몇 번 깜빡여 보고, 아직 어둑한 거리를 나서 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며 다시 입을 뗀다.
‘와, 커피 진짜 땡긴다.’
‘진심. 빨리 가서 커피 사 먹자.’
언제나 끝에는 커피가 있다. 우리의 아침 씬 8할을 차지하는 장면은 보통 가기 싫어- 부류의 대사들이지만, 마무리는 틀림없이 커피다. 모든 한탄은 결국 커피로 귀결된다. 그리고 커피는 이야기를 깔끔하게 묶어낸다.
출근길 천근 같은 발걸음. 그 무게의 이유가 일 때문인지, 혹은 사람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날 떠미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도 못한다는 마음의 짐 때문인지, 나는 왜 저 곳을 향하는 것이며, 지금 유예한 행복의 끝을 맛볼 수는 있는건지, 이런 저런 답답한 상념들을 묶어내는 끝맺음이 한 컵의 검정 물이라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커피에겐 그런 힘이 있다. 그것이 물론 우리가 대단한 커피 애호가여서는 아니고, 배후에 어떤 심오한 서사가 숨겨져 있어도 아니고, 그냥 어찌 보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승리인 것이다.
컵 하나를 가득 채운 얼음들 사이로 조르륵 채워지는 물. 그리고 그 맑은 배경을 바탕으로 순조롭게 피어나가 마침내 컵 안을 검정빛으로 가득 물들여 버리는 커피 추출액, 고소한 향, 마지막으로 빨대를 휘휘 저어 달각거리는 얼음 소리를 내며 그 검은 물을 한 손 가득 움켜쥐는 일까지. 이런 일은 드물게 오각을 자극한다. 그리고 말한다.
어쩌면 모든 일들은 커피 이후의 것들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모든 것의 시작은 결국 커피이고, 그 과정에도 커피가 있으며, 이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 내 세포를 자극시키는 이 씁쓸한 검정 물을 삼켜내면 뭐가 됐든 이 여정의 이정표를 찍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뚜껑 위로 새어 나오는 커피향을 코 끝에 스친 뒤에, 매 마른 입안에 차가운 커피 한 입을 쪽 빨아 넘기고 우리는 남겨진 마지막 대사를 마저 읊는다.
‘와, 이제 좀 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