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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Feb 11. 2018

내 안에 얽혀 있는 선과 악

빅토르 위고, 『파리의 노트르담』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뉴스에 나오는 정의의 인물은 언제나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기를 우리는 기대한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많은 위안과 힘을 주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믿었던 사람조차 배신해버린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슬픈 결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슬픈 결말이 현실에서는 수없이 많이 일어난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들


빅토르 위고가 쓴 『파리의 노트르담』의 주인공은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사랑하는 꼽추 카지모도, 그러나 페뷔스 중대장을 짝사랑하는 에스메랄다, 신부의 본분을 망각한 채 에스메랄다에 대한 욕정에 사로잡힌 클로드 프롤로 부주교다.


꼽추이고 귀머거리인 카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사랑하게 된다. 카지모도는  다가갈 수 없는, 마음속의 사랑을 품게 된다. 그런데 에스메랄다를 차지하려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으니, 카지모도가 괴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났을 때 거리에서 데려와 키운 프롤로 부주교였다. 그는 에스메랄다와 페뷔스가 밀회하는 것을 옆방에서 몰래 훔쳐보다가 격분하여 페뷔스를 칼로 찔러 죽이고 도망간다. 그러나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그때 쓰러졌다가 깨어난 에스메랄다였다. 그녀는 사악한 마법으로 페뷔스를 살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교수형을 선고받는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로 생각했다. 페뷔스를 죽인 진짜 범인 프롤로 부주교는 감옥에 갇힌 에스메랄다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한다. 


“내 육신은 여자의 모습이 지나가는 걸 보고 흥분했던 적이 한두 번 아니었어.” 


욕정에 사로잡힌 자신을 실토한 프롤로는 주님이 인간과 악마를 똑같은 힘으로 만들어놓지 않은 잘못을 했다며,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말한다. 그의 고백을 들은 에스메랄다는 몸서리친다.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죽음


살인자 프롤로 부주교 대신 에스메랄다가 교수대에 올랐다. 그때 갑자기 카지모도가 나타나 에스메랄다를 구출하여 군인들도 들어갈 수 없는 성역(聖域)인 대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프롤로 부주교는 에스메랄다를 카지모도에게서 떼어내기 위해 집시들이 노트르담 대성당을 공격하도록 한다. 집시들은 에스메랄다를 구하기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을 포위 공격하지만, 카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죽이려고 온 군중으로 착각하고 맞서 싸운다.


 그사이 프롤로 부주교는 에스메랄다를 성당에서 빼내 도주한다. 그는 그녀에게 죽음과 자기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에스메랄다는 끝내 프롤로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그러자 프롤로는 헌병대에 신고한다. 에스메랄다는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에스메랄다가 교수형에 처해지던 그 시간, 카지모도는 종탑 위에서 프롤로 부주교를 지켜본다. 


그 불쌍한 소녀가 교수형에 처해지던 가장 끔찍한 순간에 악마의 웃음이, 인간이 인간이기를 그만두었을 때나 나올 수 있는 웃음이 프롤로 신부의 창백한 얼굴에 번졌다. 그 모습을 보고 격분한 카지모도는 그에게 달려들어, 그가 굽어보고 있던 구렁텅이 속으로 등을 밀어버린다. 프롤로는 비명과 함께 떨어지지만, 카지모도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대신 카지모도는 그레브 광장의 교수대에 있는 에스메랄다를 바라본다.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이 없던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조용히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다. 


“오! 저 모든 것을 나는 사랑했는데!”


이 한마디는 카지모도의 비통한 슬픔을 그대로 드러낸다. 카지모도에게는 에스메랄다와 프롤로 부주교 두 사람 모두,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가장 사랑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자기 눈앞에서 죽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에서 2년 반 후에 사람들은 몽포콩의 지하실 유골 더미에서 두 송장을 발견한다. 카지모도가 죽은 에스메랄다를 찾아와 그곳 지하실에서 함께 죽었던 것이다. 



부조리한 권력은 개인의 사랑도 허용하지 않는다


『파리의 노트르담』은 비극적인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고뇌하며 고통 받다가 죽는다. 카지모도는 사랑하는 에스메랄다에게 다가갈 수 없어 고통스러웠고, 아버지 같은 프롤로 부주교가 그녀를 차지하려는 것을 알고 괴로워했다. 에스메랄다는 페뷔스 중대장을 향한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해 처절했고, 프롤로 부주교는 에스메랄다를 차지하려는 욕정을 이기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 그들의 사랑은 모두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카지모도와 에스메랄다, 그리고 프롤로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들의 죽음은 인간 내면의 다중성이 만든 결과였다. 이 작품에서는 어느 누구도 선 혹은 악을 독점하지 않는다. 선하기만 한 인물도, 악하기만 한 인물도 없다. 빅토르 위고에게 인간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는, 그래서 고통스럽고 고뇌하는 존재였다.


카지모도는 에스메랄다를 향한 순수한 사랑을 구현한 인물로 나온다. 외모는 흉측하지만 그녀를 위한 마음은 순결하기 이를 데 없다. 대성당 독방에 있는 그녀를 건드리지도 않고, 그녀가 자신의 외모를 보고 불편해할까 봐 눈에 띄지 않게 다닌다. 마지막으로 에스메랄다의 시신을 껴안고 시체들이 쌓여 있는 지하실에서 죽어간다. 하지만 카지모도는 거칠고 심술궂은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에 에스메랄다를 겁탈하려고 했던 난폭한 인물이다. 그리고 에스메랄다와 프롤로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코 온순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그는 주위에서 증오밖에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그 증오를 취했다. 남들이 자기에게 상처를 입힌 그 무기를 주운 것이다.


에스메랄다 또한 이중적이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그녀는 추한 외모를 가진 카지모도를 외면한다. 그녀가 카지모도의 보호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 것은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준 카지모도가 대성당 안에서 각별히 자신을 지켜주었을 때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의 마음은 끝까지 페뷔스를 향해 있다. 정작 페뷔스는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고 바람둥이였지만, 그래도 페뷔스만을 사랑하는 에스메랄다의 모습은 답답하기조차 하다.  


이중적인 내면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프롤로 부주교다. 에스메랄다에 대한 욕정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내면의 악에 의해 선이 무너져버린 인물이다. 여인에 대한 그의 소유욕과 집착은 신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그는 결국 자신의 양아들인 카지모도에 의해 떠밀려 추락사하고 만다. 신부와 그의 양아들이 한 여인을 놓고 사랑과 질투의 증오극을 벌인 비극적 결말이다.


하지만 에스메랄다의 죽음은 통속적인 삼각관계가 낳은 치정극의 결말로 해석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에스메랄다처럼 죄 없는 착한 여인이 어째서 처형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녀는 악마가 되어버린 프롤로 부주교와 불합리한 재판제도, 그리고 비이성적인 군중에 의해 교수형을 당했다. 교회는 부패했고 형벌은 지배계층의 마음대로 행사되었으며, 군중은 미신 같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에스메랄다의 죽음은 마녀사냥이라는 사회적 타살이었다. 


카지모도가 분노하며 프롤로 부주교를 죽인 것은 단지 신부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에스메랄다처럼 죄 없는 여인을 죽인 15세기 사회의 폭력과 부조리에 대한 항의였다. 카지모도는 불쌍한 자신을 거두어 키워준 프롤로 신부에게 평생 복종하며 살았다. 그랬던 카지모도가 감히 신부를 죽인 것은 모순된 교회권력에 대한 봉기였고, 민중을 개나 소로 여기는 지배계층에 대한 반란이었다. 


그런 점에서 『파리의 노트르담』은 단순한 사랑 소설이 아니라,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역사소설이기도 하다. 15세기 프랑스 사회를 살았던 귀족, 성직자, 의사, 집시, 부랑자 등 온갖 인간 군상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들 사이의 사랑과 증오와 질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부조리한 법제도와 타락한 교회권력, 그리고 무지한 군중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사랑조차 이루지 못하고 파멸로 가는 비극적 삶에 갇힐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인간의 얼굴은 여러 개다


그런 점에서 『파리의 노트르담』은 다의적이다. 주인공들의 비극적 삶은 개인적이기도 하고 사회적이기도 하다. 모든 삶이 그러하듯이 카지모도, 에스메랄다, 프롤로의 삶에는 개인과 역사가 얽혀 있다. 그들 개인이 선한 의지만 가진 존재였더라면, 그리고 그들이 사는 사회가 선한 얼굴만 가진 사회였더라면 주인공들의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인과 사회 그 어디에도 선한 의지만 존재하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위고가 등장인물들을 통해 잘 묘사하고 있듯이 인간은 선과 악 어느 하나로만 규정할 수 없는 존재다. 아무리 선하다고 칭송받는 사람도, 반대로 아무리 악하다고 비난받는 사람도 그의 내면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존재한다. 선과 악 가운데 어느 하나의 힘이 일방적으로 압도하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두 개의 다른 방향 사이에서의 고뇌는 인간이 걸머진 숙명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에게서 드러나는 내면의 다중성 역시 인간이라면 피해가기 어려운 굴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선한 얼굴을 가진 인간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좀처럼 통제하기 어려운 욕망이라는 본성이 있다. 틈만 있으면 꿈틀대는 욕망이란 놈은 우리의 삶을 시험에 빠뜨린다. 재산 욕심, 권력욕, 명예욕, 인간에 대한 소유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기적 욕망들이 우리를 따라다니며 탐욕스러운 존재로 만들려 한다. 그로 인해 우리는 다중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공공선(公共善)을 실현하는 이타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 나, 개인의 욕망에 매달려 이기적 삶을 살려는 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의 모습인가를 찾으려고 갈등하며 고뇌하는 나, 이렇게 여러 개의 자아가 충돌하기도 하고 공존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지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도 그 굴레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흔히 하는 착각 가운데 하나는, 정의를 말하는 사람의 삶은 반드시 정의로울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많은 실망과 배신이 생겨나기도 한다. 프롤로 부주교가 욕정에 갇혀 에스메랄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악마가 되었듯이, 욕망에는 사실 정치적 이념이나 신분, 나이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뒤로 숨긴 채 대중에게 천사처럼 나타나 환호를 받으면서 정치적 신분 상승을 이루어가곤 했다. 그럴 때 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며 그 비밀을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타인의 욕망은 불륜이고 나의 욕망은 로맨스인 것일까. 


이처럼 우리가 이기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어떤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토머스 홉스에 따르면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삶과 평안이 타인의 그것보다 중요하다. 그는 인간이란 전적으로 욕망의 지배를 받는 ‘본질적인 이기주의자’라고 생각했다.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에서 “내 손가락에 상처를 내기보다 온 세계가 파멸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해서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내 손가락이 다칠지 모르는 순간, 나 이외의 세계는 관심에서 사라지게 된다. 내 손가락을 다치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숨기고 싶은 갈등은 계속된다.



욕망의 두 얼굴


물론 인간에게 어느 정도의 욕망은 살아가는 데 자극이 될 수 있다. 욕망은 경쟁심이라는 또 하나의 인간 속성을 발동시키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굳이 탓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욕망에 갇힐수록, 그래서 집착할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면 낙담하게 된다. 세상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으면 스스로 기가 죽게 된다. 그 모든 것이 자신에게 상처 주고 스스로를 옥죄는 것들이다. 욕망이 나를 승자로 만들어주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패자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욕망의 노예가 아닌, 욕망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주인이 될 일이다.


노트르담 성당에서의 비극은 15세기 프랑스 사회가 낳은 모순과 부조리,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의 다중성이 낳은 것이었다. 언제나 선과 악은 경계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뒤얽혀 있곤 했다. 인간의 삶에서 행복보다 비극의 서사가 더 많은 이유다. 이제 나이가 드니 “선과 악이 종잡을 수 없이 얽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던 도로시 파커의 시 구절은 사실은 나의 얘기이기도 하다.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의 내용 전체는 제가 쓴『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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