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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선 Feb 18. 2018

증오조차 녹여내는 위대한 휴머니즘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가 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 (사우, 2017)의 내용을 브런치에 맞게 요약하여 연재합니다. 전체 글은 책을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위대한 인본주의 서사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을 무대로 인본주의의 위대함을 표현한 서사시다. 주인공은 영웅 아킬레우스다. 그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자신의 여자를 강제로 빼앗고 자신을 모욕한 데 격분하여 전투 참여를 거부한다. 대신 친구 파트로클로스에게 자신의 무구를 입혀 출전시키게 된다. 그런데 파트로클로스는 도망하는 트로이군을 추격하다가 결국 헥토르의 손에 죽고 만다.


친구의 전사 소식을 들은 아킬레우스는 큰 충격을 받고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쟁터로 나간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군을 성안으로 몰아넣는다. 이에 맞선 헥토르는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문 앞으로 나가 아킬레우스와 일전을 치른다. 결국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죽고 만다.

아킬레우스의 복수는 헥토르를 죽인 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다니며 욕보였다.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죽음은 엄청난 슬픔이었다.


프리아모스의 아내 헤카베는 위험하다고 울면서 만류했지만,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아킬레우스의 처소까지 찾아간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 그에게 프리아모스는 이렇게 애원했다.


“혼자 남아서 도성과 백성들을 지키던 헥토르도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얼마 전에 그대의 손에 죽었소.

그래서 나는 그 애 때문에, 그대에게서 그 애를 돌려받고자

헤아릴 수 없는 몸값을 가지고 지금 아카이오이족의 함선들을

찾아온 것이오.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 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하시오. 나는 그 분보다 더 동정받아 마땅하오.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차마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인간적인 연민이 만들어낸 극적 반전


이 호소는 아킬레우스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통곡하고픈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그는 프리아모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생각에 잠겨 프리아모스는 꺼이꺼이 울었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그리고 죽은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울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찼다. 아킬레우스는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자신을 찾아와 애원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불쌍한 마음이 든 것이다. 그리고는 그렇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아들을 위해 슬퍼한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며 아들을 도로 살리지도 못할 것이라며. 잠시후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에게 시체를 인도해준다.


아킬레우스는 하녀들을 불러 프리아모스가 아들을 보지 못하도록 시신을 들고 가서 씻고는 기름을 발라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헥토르의 시신을 반들반들 깎은 짐수레에 실었다. 프리아모스에게는 장례식을 치를 때까지는 휴전할 것이니 안심하라고 약속한다. 그렇게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돌아갔다. 


아킬레우스는 복수에 불탄 야수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세상으로 왔다. 『일리아스』를 다른 영웅시와 구별 짓는 새로운 덕이 나타났으니,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존경과 도덕심이었다.


『일리아스』를 읽으면서 주로 ‘용기’라는 키워드에 주목한다. 아킬레우스는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분노, 프리아모스는 아들 헥토르를 잃은 분노 때문에 목숨을 걸고 나서는 용기가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용기 있는 영웅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대한 해석을 그 지점에서 그친다면 무척 아쉬울 것이다. 분노와 용기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인간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인본주의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영속성을 가진 인류 최고의 정신이다. 어떠한 이념이나 정치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뛰어넘는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 



인간에 대한 절망과 낙관 사이에서


하지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대의 불의에 분노하기 시작한 청소년 시절부터 나이가 제법 든 지금까지, 세상을 향한 분노의 정념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왜 이러한가! 어째서 착한 사람들은 힘들게 사는데, 나쁜 자들은 저렇게 잘 살고 있단 말인가! 그런 분노가 있었기에 젊은 시절 세상을 바꾸는 삶에 대한 고민을 했고, 정의로운 삶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친구의 죽음에 분노하며 목숨을 걸고 싸운 아킬레우스,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여 시신을 달라며 적진으로 들어간 프리아모스보다 이타적인 것이 우리들의 용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의 눈은 정의롭기는 했으되, 구체적인 인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전 원고 작업을 위해 자료들을 뒤져보다가 25년 전 어느 잡지에 내가 썼던 글을 읽어보게 되었다.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의 강연 내용과 그에 관한 나의 글이 나란히 특집으로 실렸었다. 나는 당시 선생이 강연에서 하신 말씀에 충격을 받고는 공개편지 형식으로 글을 썼다. 소련의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진보적 지성들이 충격을 받고 방황하고 있을 때라, 글이 공개된 직후 화제가 되어 『한겨레』에 상자 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때 선생은 “이제 우리는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 왜 세계는 이 같은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며 이런 얘기들을 꺼냈다. “문화혁명과 같은 인간개조 실험은 순수한 영웅성, 자기희생성, 박애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인간 자체가 그러한 존재는 아니다. 동물적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며 인간의 소유욕에 대한 투쟁, 경쟁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선생은 마침내 인간에 대한 체념을 고백했다. “우리는 세계가 30퍼센트 정도의 타락과 60퍼센트의 도덕성, 인간성을 유지하면 성공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러한 타협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현실과 이상이 조화되는 안정된 사회이며 ‘존재를 위한 체념’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면서 “어째서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사악한 인간들이 이 세계에서 오히려 승리하는가. 가슴이 아프지만 인간은 바로 그러한 존재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선생이 내린 결론은 한마디로 인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체념’이었다. 역사에 대한 비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30대 초반의 피 끓는 청년이었던 나는 인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나의 청년기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선생께 공개편지 형식으로 글을 썼다. “선생님, 무엇보다도 가슴 아픈 것은 인간에 대한 선생님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라고 말을 꺼낸 나는, “선생님의 체념을 받아들이기에는 지금 이 땅에서 너무도 많은 도덕적이며 자기희생적인 인간들의 구체적 모습들을 만나게 됩니다”라고 반론을 폈다. 그러고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체념하기엔 이 땅에는 너무도 많은 전태일, 그리고 이한열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라며,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고서 역사의 발전을 신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야말로 지금 우리의 가장 큰 힘입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인간에 대해 체념해서는 안 되며, 여전히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낙관적 ‘믿음’을 말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놀랐다. 그때 선생이 하셨던 말들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한 청년이, 선생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세상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지키자고 떼를 쓰고 있었다. 나는 이념을 말하고 정치를 말했지만, 정작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은 보지 못했던 화석처럼 굳은 사고에 갇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세상의 별별 일을 겪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했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본성이며, 인간이란 기대만큼 그리 이성적이고 도덕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인간 본성의 그런 그늘은 이념과 정치를 불문한 인간의 굴레였다. 낙관과 희망이 자리했던 자리에는 시간이 갈수록 실망과 체념의 정서가 밀고 들어오게 되었다. 물론 ‘체념’이 모든 것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는 허무주의는 아닐 게다. 체념하면서도 또 어떻게든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오랜 역사 속에서 반복된 인간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나도 선생을 향해 도발적인 편지를 썼듯이, 나의 이런 생각 역시 누군가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같은 시간 누군가에게는 체념의 농도가 짙어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는 것, 그것이 세상의 풍경이다. 그런 모습이 교차하면서 인간의 역사는 그래도 희망의 불씨를 간직해왔을 것이다.



가장 오래 가는 것은 사랑


이념과 정치는 한시적으로는 우리를 이끌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내 삶의 대안적 가치가 되기는 어렵다. 그것들은 애당초 영원할 수 없도록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직 영원한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중,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기서부터 가장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이념과 정치가 낳은 분노보다 사랑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정치가 우리의 내면을 깊숙이 지배할 때 분노의 노예가 되는 광경을 흔히 목격하게 된다. 정의를 실현하겠다며 시작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에 대한 신앙의 수준으로 가버리게 된다. 그때부터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배척하게 된다. 이러한 적대감의 표출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식으로 벌어지고 만다.


도대체 정치라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 인한 충돌을 조정하기 위해서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와 정치가 생겨난 게 아닌가. 그런데 다시 그 정치로 인해 통제할 수 없는 만인 간의 투쟁이 벌어진다면 우리의 앞길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먼저 손잡아주려는 모습 없이 내 곁에 사람이 올 리 만무하다. 서로 간에 생각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인간적 연민과 연대로 뛰어넘는 것이 인본주의 정신이다.


프리아모스에게 아킬레우스는 그토록 아끼던 아들을 죽인 원수였다. 하지만 그 원수 앞에서 아버지는 울며 애원했다. 또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였지만 사랑했던 전우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슬픔과 분노는 여전했다.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끌고 다니며 욕보인 이유가 그것이었다. 하지만 자식의 시신을 돌려달라며 애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원수 사이였지만 마찬가지로 가족을 생각하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연민이 흘렀던 것이다. 정치보다, 전쟁보다 위대한 것은 존엄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다. 


가장 오래 가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요 인본주의다. 사실 정치도, 심지어 그 어떤 혁명조차도 지나고 보면 덧없는 것이다. 언제나 인간이 먼저다. 이 시대의 정치가가 되려 할 것이 아니라 영원한 휴머니스트가 되려는 꿈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더 많은 것을 껴안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이제부터라도. 


이 글의 내용 전체는 제가 쓴『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자세한 책 소개를 둘러보세요.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87332145


"당신의 영혼을 흔들고 찌를 12권의 책

읽고 사유하는 사람만이 싸우고 사랑할 수 있다"


저자 유창선은 내면의 힘을 키워준 책 12권을 소개한다. 단순히 인문학 고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이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오늘 이곳에서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밀도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고 존엄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하는 한 지식인의 자기 탐구 기록이기도 하다. 책 읽는 사람이 시공간을 초월해 위대한 사상가와 온몸으로 만날 때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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