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오늘은 휴가 마지막 밤. 자영업이라 제멋대로 2주나 쉬어놓고도 여전히 믿기지 않아서 가만히 일하는 기분을 내본다.
휴가 동안 책을 좀 읽었는데, 그 중에 훈클럽(독서모임) 다음 시즌의 첫 책 선정자로서 고민해보았다. 사실 독서모임을 하는 동안에는 모임을 위한 책을 읽느라 내가 읽고픈 책을 내 마음대로 읽을 수 없어, '이거 읽을 시간에 독서 모임 책을 읽어야지'라는 생각에 빠져버린다. 독서모임이 끝나고 휴가 때엔 내가 내 마음대로 고른 책으로 읽어서 기분이 퍽 좋았다. 하지만 내가 기분 좋게 읽을 책이라도, 모임의 사람들에게 같이 읽자고 말하는 순간, 이 책 역시 그들에겐 의무로 읽어야 할 책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우리는 얼만큼의 자발심으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그런 사실을 인지하고나니 책을 고르는 일이 너무 어려워졌다. 사실 여태까지 책을 고르면서 너무 아무런 고민 없이 책을 골라왔구나, 싶어 멤버들에게 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고 좋다고 생각하는 책을 읽자고 주장했고 읽고 만나서는 내 생각만 주구장창 떠들었을 것이다. 내가 멤버들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면서 이 책에 대해 그는 뭐라고 생각할 것인가, 또 어떻게 이 책을 받아들일 것인가, 따위를 고민한 적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닌데. 이번엔 '사람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까지 도달해버렸다.
고민을 가득 안고 무거운 마음으로 책을 다시 읽었다. 책은 좋았다. 수영을 마치고 김밥 한 줄을 우걱우걱 먹으면서 읽을 때도 좋았고, 토요일 오후에 식탁의자에 거의 눕다시피 앉아서 읽을 때도 좋았다. 지난 글에서 인생은 하찮은 일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밝혔는데, 독서도 그 하찮은 일 중에 하나일 뿐이다. 우리는 참 재미도 없고 별 의미도 없는 인생(나에게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밝히는 바이다)을 살아가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렇게 하찮은 하루하루를 정성껏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나에겐 독서모임이다. 독서모임이 하찮은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야만, 우리는 그 독서모임을 계속할 힘을 얻을 수 있다. 만일 그게 어쩌다 한 번 있는 이벤트라면 우리는 계속할 수 없다. 일상이 훨씬 힘이 세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나자 어떤 책이 '꼭 읽어야 할 책'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읽을 책은 세상에 수많은 책 중에 한 권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하찮은 책 한 권이 내 일상으로 스며들고, 모임 멤버들의 일상이 되면 그것으로 그 책은 자신의 모든 역할을 다 한 셈이 된다. 나는 내가 수업을 하고, 모임을 진행하기도 하기 때문에, 타인의 시간을 무척 귀하게 여긴다. 그들이 우리 책방에 걸음을 하고 와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이 의미있고 빛나길 바란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나에게는 그럴 힘이 없다. 다만 나는 그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 수는 있다. 하찮은 동네 책방이 되어서 그들이 걸어다니는 길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그들의 동네 한 구석을 차지할 수 있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내일도 나는 책방 문을 열러 가는 것이다.
이번에 내가 고를 책은 신간 가운데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읽은 책이다. 슬픈 책이고, 누군가는 읽으며 고통스러울 책이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을 골랐다. 우리의 일상에서 슬픔과 고통을 빼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점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