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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호 Mar 17. 2021

뒤죽박죽 가족 연대기 14

학교 가는 길

 16. 학교 가는 길


 우리 집 형제 네 명은 순차적으로 같은 초등학교, 예전 단어로 국민학교를 다녔다. 형이 6학년일 때 나는 1학년이었고 내가 4학년에 올라갈 때 쌍둥이가 입학했다. 그렇기에 각자의 학교생활은 일부러 얘기하지 않으면 잘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다녔던 학교는 집에서부터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말이 10분이지 집에서도 학교는 바로 보였지만 정문과 후문이 우리 집과 반대편에 있어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학교의 담장은 높았다. 특히 우리 집 쪽에서 보면 높은 축대가 있었고 그 위에 학교 담장이 있어 어린 나에게는 좀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학교를 가는 길은 두 가지였다. 대문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한옥골목을 지나고 큰 도로를 만나면 오른쪽으로는 차들이 다니고 왼쪽으로는 학교 축대가 있었다. 걷다 보면 축대는 점점 낮아지다가 내 키만큼 낮아질 즈음 학교 후문이 나온다.

 그렇게 지나는 한옥골목은 한쪽으로 개량형 한옥들이 1백 미터 가까이 이어진 골목이었다. 나무기둥이 집 전체를 지탱하고 벽돌로 벽을 쌓은 데다 세련된 나무 대문에 기와를 얹어 한옥이기는 했지만 완전히 밀폐형 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이 나오지만 흙은 볼 수 없다. 바닥은 시멘트로 바르거나 심지어 전체를 타일로 깐 집도 보았다. 사각의 작은 마당을 가운데 놓고 본채와 부엌, 사랑채, 문간방, 장독대 등이 둘러싸고 있는 사각 구조였다.

 생각해보면 이 집들은 상당히 부잣집이었고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내가 집의 구조를 아는 것도 학년이 바뀌면서 그 한옥들 중 하나에 사는 친구가 생겨 들어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우리 집 대문을 나와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좀 더 흥미진진한 등굣길이 된다. 일단 1백 걸음 왼쪽, 2백 걸음 오른쪽에 구멍가게들이 연이어 있어 자꾸 걸음이 느려지는 길이다. 그렇게 1백여 미터 간 후에 왼쪽으로 꺾으면 빨갛고 파란 회전등이 돌아가고 있는 신흥 이발소를 만난다. 단골 이발소이기는 했지만 이곳은 피하고 싶은 장소이다. 

 어린 나이에는 이발소 가는 일이 아주 싫었다. 일단 졸렸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앉는 이발 의자 좌우 팔걸이 위에 나무판자를 얹고 그 위에 앉았다. 그러면 졸렸다. 이발하는 날이면 주로 아버지가 따라온 것 같은데, 신발을 벗고 나무판자 위에 앉아 목을 조이는 흰 천을 두르자마자 졸렸다. 한쪽 귀밑에서 그 무서운 바리캉의 차갑게 위협하면 몸을 부르르 떨다가 졸렸고 그 바리캉이 뒤로 돌아가 날 선 이빨로 뒷머리를 피나게 씹어대도 졸렸으며 반대쪽 귀 앞에서 사각사각 얼러도 졸렸다. 그러면 머리 감아주는 아줌마가 한쪽 머리를 붙잡았고 아버지까지 가세해 아이답지 않게 큰 머리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팠다. 어렵사리 이발이 끝나고 듬성듬성 타일을 붙인 개수대 앞에 앉아 죄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조아리면 아줌마는 먼저 뜨거운 물로 지지는 고문을 시작한다. 물론 물이 충분히 뜨거운지 손으로 온도를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 후, 화분에 물을 주는 작은 물뿌리개로 용암 같은 물을 뿌리는 것이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다. 그다음 단계는 청바지 빨래할 때 쓰는 굵은 빨래솔로 비누칠한 머리를 박박 문지르는 것이다. 아마도 나를 외계인이라고 생각하고 가짜 피부를 벗겨내려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기도 전에 너무 아팠다. 이 모든 고문이 이발하면서 졸았다는 죄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일러스트 by 도터맨 20210317


 이발소를 멀리 피해 걷다 보면 저기 앞에 지옥이었다가 천당이 된 동신 목욕탕이 보인다. 이때 바로 오른쪽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제 아주 경사가 가파른 계단이 나오고 여기를 오르고 나면 뛰어야 한다. 일명 짱구 골목이다. 이 골목에는 우리가 짱구라고 부르며 무서워하던 남자가 살았다.

 머리가 크고 대칭이 잘 맞지 않는 선천성 장애가 있는 남자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를 해할 마음도 능력도 없으며 걸음도 느렸던, 나이도 가늠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소문을 만들었다.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었는데 뭔가를 연구하다가 미쳤다는 둥, 누군가 그의 연구를 파묻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다는 둥.

 그 사람은 자주 보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아마도 산책을 하고 있었을 이 남자를 만나면 ‘짱구다!’를 외치며 도망갔다. 그렇게 뛰다 보면 저기 골목이 끝나는 곳에 떼를 지어 학교로 몰려가는 아이들이 보인다. 그렇게 한쪽 등굣길은 좀 긴박했다.     


 정문 앞은 깔때기 모양을 하고 있었다. 폭이 넓은 길에서 언덕을 내려가며 점점 좁아져 정문에 이른다. 마치 새까맣게 모여드는 아이들을 어느 병에 쓸어 담는 것 같았다. 학교의 전체 학생 수는 6천 명이 넘었다. 그러니까 한 학년이 1천 명에 이르고 교실 당 70명에서 80명이 모여 있으며 17반에서 18반까지 있었다. 놀라운 숫자이다. 오늘에서야 이름이 학교이지 낮 동안 아이들을 가두어 두는 수용소가 아니었는지 갸우뚱해본다.

 다른 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만나면 우리 학교의 학생수가 더 많다고 자랑하며 으쓱하기도 했다. 그런 학교는 어느 때부터인가 저학년은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서까지 수업을 진행할 정도였다. 점심시간에 3층에서 내려다보면 아이들로 가득 찬 운동장은 흙땅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글짐에 한번 올라가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멀리서 보면 쇠기둥은 잘 보이지 않아 사람으로 쌓은 탑 같았다.     


 인스턴트커피 유리병에 신김치 냄새 풍기는 도시락을 싸갔던 우리는 밥 위에 계란 프라이가 덮여있고 반찬통에 빨간 소시지를 싸오는 아이들이 부러웠지만 이들보다 더 위 계급이 있었다. 급식을 먹는 아이들이다. 학교에서는 급식비를 내는 아이들만 급식을 주었다. 우리가 김치가 담긴 유리병을 열 때 그 아이들은 식판에 빵과 우유를 받아 멋지게 자리에 앉았다. 등껍질을 까맣게 그을린 거북이 같은 급식 빵과 삼각 피라미드 모양으로 비닐포장된 초콜릿 우유였다. 손으로 뜯어낸 빵의 달콤한 냄새를 자랑삼아 우유 포장에 기술적으로 빨대를 꽂아 볼이 옴폭 파이도록 쪽쪽 빨아먹는 아이들은 얄미우면서 부러웠다. 한 교실에서 보아야 했던 점심 풍경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특별한 사건들을 기억하기 어렵다. 놓고 온 도시락을 들고 교실까지 찾아온 엄마를 부끄러워 볼이 빨개진 채 복도로 만났던 기억,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회 때 그 많은 학생들을 두고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았던 딱 한 번의 짜릿한 기억도 있다. 한동안 눈여겨보던 예쁜 여자아이도 있었다. 우리 집 분위기와는 다르게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그 아이는 살짝 다리를 절었다.

 사실이 아닐지도 모를 한 시절은 이렇게 희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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