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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여자 01화

첫 번째 여자

by jamie

스무 살 봄.

남자는 사는 지역 대학교에 입학했다.


어슬렁어슬렁 고등학교를 마친 뒤 그곳과 다를 바 없는 -건물이 몇 개 더 있다는 것, 복장과 머리 단속이 없다는 것, 스쿨버스 대신 시내버스를 타야 한다는 것 외에는- (이상하게 그는 여전히 종종 꿈속에서 버스를 놓쳐 강의 시간에 지각한다.) 규모만 큰 또 다른 무덤 같은 곳, 이름 모를 뒷산에 기댄 공간에 떠밀린 그는 감각하지 않았다. 나이 앞자리가 2로 바뀌고 청소년이 아닌 성인으로 분류되는 것에도 어떤 신명이 없었다.


대학 생활은 산속 고등학교에 종일 갇혀있던 삼 년보다 더 따분했다. 왜 배우는지 알 수 없는 학부 수업을 듣는 것은 고문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창밖을 보며 ‘그냥 날 죽여’라고 흥얼거렸다. 전공도 마냥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플라톤은 플랑크톤이고 공자는 공짜였다. 헛소리라는 이야기.


그나마 학교에 몸을 끌고 갈 수 있었던 건 (생각은 늘 자신의 방에 두고 다녔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동기들 때문이었다. 각기 다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안면도 없던 그와 그들은 그저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하나가 하나를 만나고 그중 어떤 하나가 새로운 하나와 연결되어 이어지는 식. (인간관계의 정석은 다단계다.)


아마 다들 외로웠을 것이다.

혼자인 이들이 자신과 비슷한 외로움의 그림자를 맡고 모였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그들이 즐겨 한 놀이는 세 가지였다. 스타크래프트, 미팅, 당구. 남자는 모두 형편없었다. 놀 때도 머리를 써야 한다는 이해 못 할 사실에 저항하고자 일절 뇌를 가동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삼 년 동안 노는 친구들 무리에 껴 치던 당구는 20을 넘기지 못했다. 친구들이 머리와 손을 빠르게 움직여 스타크래프트를 하는 동안 그는 입을 놀리기에 바빴다. 그에게 욕을 가르쳐 준 건 스타크래프트 할 때만 튀어나오는 승부욕이었다.


여자 손 한 번 잡은 적 없는 그에게 미팅은 무리수였다.


그럼에도 동기들의 성화에 못 이겨 그는 딱 한 번 미팅 자리에 나갔다. 동기와 동기의 여자 사람 친구가 나름 사명을 갖고 진행한 그런 미팅에. 그 자리를 위해 그가 준비한 행위는 삭발이었다. 왜 삭발하고 싶었는지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마 선망하던 할리우드 배우가 삭발을 했겠지) 누구에게 에프터를 신청할지 보다는 어떻게 하면 미팅 분위기를 떠들썩하게 만들지가 그의 화두였다. 그는 무척 사람들을 웃기고 싶었다. 인문학부에서 제일 재밌는 사람으로 칭송받길 바랐다.


그는 계획한 대로 미팅 참가자들을 민둥산 같은 머리로 놀라게 한 다음 온갖 재치를 떨었다.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어딘가에 맡긴 채 완벽한 광대가 되었다. 성공한 쇼는 마니아를 양성했다. 그가 충분히 예상한 것처럼. 미팅 주선자를 통해 그에게 전달된 소식은 누군가 그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이야기. 동기 녀석의 부럽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고민했다.

소식을 무시할 것인지 아니면 여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할 것인지.


그는 어떤 결정을 내리고 또 완벽한 계획을 그렸다. 이슬비가 내려 공기가 촉촉했던 날 그는 작전을 개시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학교 운동장 구령대에 섰다. 한 손에 케이크를, 다른 손에 장미꽃을 들고. 약속한 시간에 맞춰 그녀 역시 구령대에 섰다. 계단을 오를 때부터 짓던 미소와 함께. 그는 정말 조심스럽게 다가가 케이크와 장미를 전달했다. (그녀가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당시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증정식이 끝난 뒤 그녀는 무척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운동장 한편에서 지켜보던 동기들의 얼굴엔 장난기가 흘러넘쳤다.


일주일 뒤 미팅을 주최한 동기가 그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고백했던 그녀에게서 온 이별 통지서. 긴 내용이었지만 핵심은 ‘그렇게 살지 마’라는 것.


그 편지를 받기까지 그가 그녀에게 취한 행동은 고백한 다음날 아침 좋은 아침이라는 문자 한 통과 그녀에게 온 문자에 대해 아주 느리게 답장하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전화를 피한 것은 물론 만나자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백은 완전히 퍼포먼스였다. 아주 몹쓸 행동이었지만 그는 그녀가 버린 감정과 시간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방관했다. 자신의 무책임에 질렸다.


동기들과의 술자리에서 ‘부부의 세계’의 이태호처럼 떼를 썼다. 그녀가 먼저 호감을 드러냈다고. 거기에 응한 게 죄는 아니지 않냐고. 창피해하는 동기들의 표정을 느끼면서도 그가 안주발 다음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미성숙한 자신을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심판한 그녀가 누군가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간고사, 축제, 기말고사가 무심히 흘러가는 동안 동기들은 여자를 만났고 데이트를 하고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새로운 여자를 만났다. 그는 500cc만 들이켰다. 대학가 호프집의 맛없고 양만 많은 소위 맛대가리 없는 안주 같은 동기들의 연애와 이별에 대한 이야기들을 곁에 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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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