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태어나기 삼년 전
1979년 어느 오후, 여덟 해를 무사히 지나온 작은 한강은 분주했다. 부모님이 자신에게 서울로 이사한다는 소식을 알리자 곳곳에 기록된, 흩어져있던 자신의 시들을 한 권에 엮고 싶었기 때문. 신문지처럼 거친 회색 빛 종이들을 접어 스테이플러로 여며 책을 만들고, 그 조그마한 공간에 몽당연필로 자신의 시를 한 행 한 행을 옮겨 적었다. 그러모은 이야기들 중 어느 한 편은 이렇게 시작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사랑이란 무얼까?
2016년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영국 소설 문학상인 부커 국제상을 수상했다. 서울에 온 뒤로 책을 읽지 않은 그는 그때 작가 한강의 이름을 알았다. '지나치게 작가스러운 이름이다‘, 수상 직후 3일 만에 책 판매량이 11배가 늘었다는 뉴스를 보며 ’한동안 유행하겠네’ 싶었다.
그런 그에게 J가 포장된 사각형을 내밀었다. ‘00님과 닮았어요.’ 쑥스러운 다정한 미소를 보며 손에 쥐었을 때 그는 책이라는 것을 감각할 수 있었다. 자신을 닮아서 그에게 도착한 책. 퇴근 후 포장지를 뜯어 처음 마주한 곳은 책 뒷면이었다.
사라질-사라지고 있는-아름다움
더렵혀지지 않는 어떤 흰 것에 대한 이야기
’누구의 책일까?‘
앞 면으로 돌리니 반듯한 자세로 글쓴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흰
-
한 강
소 설
당시 J는 21살, 파트타이머 면접을 보러 왔다.
동양적, 서양적 인상의 매력적인 부분들만 가진 지원자였다. 수수한 옷차림에 대비된 밝고 진한 붉은빛 입술이 그의 눈에 박혔다.
그는 첫눈에 동료로서 호감이 갔지만 정작 같이 근무하자 거리를 뒀다. 당시 사람들에게 정을 주는 것에 회의적인 상태인 데다 J가 면접관이었던 다른 관리자와 잘 지내는 듯보여 질투했기 때문이다.
J는 햇빛 같고 달빛 같은 아이였다. 일 할 때는 강렬했고 놀 때는 빛 났고 혼자 있을 때는 예뻤다. 그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J였다. 그가 J에게 둔 거리가 어느새 철거되어 있었다.
J를 만난 해 그는 미술관에서 일했다.
두 번째 직장으로 그에게 관리직은 처음이었다. 모든 일을 문서화하고 보고와 승인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 행정에 서툰 그는 실수 투성이었다.
J의 또래들인, 파트타이머 친구들을 관리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수평 문화를 선호했던 그는 수직 문화를 지향하는 윗 선에 깨졌고, 각자의 방식으로 선을 넘는 아이들에게 데는 일이 퍼레이드처럼 펼쳐졌다. 게다가 툭 건드리면 와장창 부서지는 유리 멘털을 가진 터라 퇴근길 버스에서 깨진 파편들을 어르고 달래 이어 붙이는 매일을 보냈다.
365일이 겨울 같던 그때, 그에게 힘을 준 사람이 J였다. 출근 시간 비추던 기분 좋은 환한 인사, 근무 중간중간 익살맞게 던지는 깨알 같은 재치, 종종 느닷없이 날리는 짓궂고 귀여운 응원이 그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2024년 12월.
한강은 스웨덴 한림원 강연장에 섰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을 하기 위해. 연설문 제목은 ‘빛과 실.’ 작가의 작업 세계를 지탱한 근원과 각 작품의 도화선이 된 물음들에 대한 이야기로 창고에서 여덟 살에 자신이 만든 작은 시집을 발견하는 일화로 시작한다. 3년 전 출간한 <작별하지 않는다> 이후의 차기작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2016년 작 <흰>과 연결되는 작품이라는 점을 알렸다.
그는 강연문에서 <흰>을 읽는 순간 두근거렸다. 박동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망원동으로 이사 온 뒤 몇 달째 정리하지 않은 박스들을 뒤적였다. 몇 개의 박스를 열어보고 나서 자신의 <흰>을 찾았다. 그가 가진 유일한 한강의 책이었다. 눈앞에 등장한 <흰>은 기억의 무덤에서 잠자고 있던 9년 전의 메시지를 깨웠다.
아주 오랜만에 펼친 <흰> 마지막 페이지
9년의 시간을 머금어 더 이상 희지 않은 그곳에서 그는 한강의 글이 아닌 누군가가 직접 쓴 메시지를 다시 발견했다. 금실로 수놓은 듯한, 느린 속도로 꼭꼭 눌러쓴 J가 그에게 하고 싶은 말.
새하얀 영혼이신 00바이저님
감사하고 또 감사해요.
바이저님 바람대로 삶을 그려주세요. ˙ᵕ˙
2016.12.17 겨울에도 이곳에 있는 J 올림.
강철 같던 세상의 막을 손이 시리도록 두드리던 그때는 그에게 단지 글자로 보였다. 세 문장을 이어간 J의 금실을 감각할 수 없었다. 그가 사람들에게 주었던 금실이 모두 끊겼다고 확신한 나머지 J가 그에게 내민 금실을 가볍게 지나쳤다. 이제야 문장의 감촉을 두드리면서 그는 깨달았다. '내 연약함을 재단하지 않고 그 자체로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한강은 깨닫는다.
2021년 <작별하지 않는다> 출간 이후, 그동안 발표한 작품들을 쓸 수 있게 만든 고통스러운 질문들에 끈질기게 직면할 수 있었던 생명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그 사랑은 1979년 봄, 어린 한강이 자신의 시에 품었던 마음이었다는 것을.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