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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추출은 물의 흐름으로 결정된다. 분쇄된 커피 가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연스레 흐르는 시간에 따라 커피 향미는 달라지며, 그 시간에 따라 신맛, 단맛, 쓴맛이 스며드는 정도도 달라진다. 내 입안에서 신맛, 단맛, 쓴맛 순으로 흘러갔던 맛들은 어찌 된 일인지 추출 시간에 따라 변해가는 맛과 동일하다. 추출이 빠르면 신맛 하나로 채워진 커피 한잔이 부담스러울 것이며, 추출이 너무 느리면 쓴맛만 남는다. 이 중간 어디쯤 단맛 나는 커피 한잔을 얻을 수 있다. 정확한 수치로 말 못 하고 어디쯤이란 표현이 애매모호 하지만 모든 추출이 동일한 시간, 동일한 맛을 추출하진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분쇄 입자에 따른 물의 흐름이나 원두 가공 상태에 따라 단맛 나는 구간이 다르기도 하며, 사람마다 물을 흘려내는 방식이 달라 같은 추출 방식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맛을 담아낸다. 여기저기서 보이는 맛있는 레시피가 나만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아무리 똑같이 따라간들, 결국은 그들과 다른 내가 내리는 커피 한잔이기 때문이다.
높은 압력을 사용하는 에스프레소는 그 압력만큼이나 큰 저항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강하게 쏟아져 나오는 물의 흐름을 조절해야 하므로 곱디고운 커피 가루를 사용한다. 자연스레 흘러가는 물의 흐름만으로 추출되는 핸드드립 - 또는 브루윙(Brewing), 필터 커피(Filter Coffee)라 불리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단어 선택의 차이만 있을 뿐 사용하는 도구는 유사하다. - 과는 전혀 다른 굵기로 갈아내야 한다. 혹여나 드립과 같이 굵은 가루로 커피를 추출한다면 급하게 쏟아져 나오는 커피들로 당황스럽기만 할 것이다. 그 맛은 익숙했던 단맛에서 멀어져 버린 슴슴한 신맛과 쌀겨나 보리와 같이 가공되지 않는 맛들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한다. 추출을 길게 하기 위해선 저항을 만들어줄 커피 가루를 더 곱게 갈아야 한다. 점점 추출이 느려지고 맛을 잡아갈수록 어느덧 익숙할 만한 신맛이 느껴지고, 더 잡다 보면 정겨운 단맛이 나를 반겨준다. 하지만 그 이상 더 가버리면 애써 잡은 단맛은 사라져 버리고 쓰디쓴 쌉싸름 만이 입안에 남는다. 보통 20초 안쪽으로는 추출되는 커피가 단내 부족한 부담스러운 신맛으로 추출되며, 30초 이상 넘어가면 앞쪽에 신맛은 가라앉고 후미에 쓴맛이 배어나온기 시작한다. 20초와 30초 사이 그 어디쯤 부담스럽지 않은 신맛과 단맛, 그리고 후미까지 균형감 좋은 커피가 추출된다. 드립이라고 해서 이 순서가 바뀌지 않는다.
에스프레소와는 달리 드립은 굵은 입자를 사용한다. 외부적인 힘 없이 중력 하나만으로 추출이 되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와 같이 너무 고운 입자를 사용하면 흘러가지 못하고 고여버린다. 고인 물이 썩어 들어가듯 커피도 물에 고여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제 향미는 잃어버리고 잡미 만 맴돈다. 고여 있는 상태가 아닌 약간의 머무름이 필요할 뿐이다. 당연히 에스프레소와 같은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커피 가루가 고울수록 추출되는 시간은 빨라야 하며, 굵어질수록 길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고운 입자는 물이 통과하기엔 밀도가 너무 높아 에스프레소와 같이 증기압이나 모터 펌프로 압력을 가해주어야 한다. 반면에 굵은 입자는 밀도가 약해 물을 어떻게 흘려내느냐가 중요하다. 다행히 에스프레소는 커피 가루의 굵기만 잘 정하면 물은 커다란 기계가 내려준다. 하지만 드립은 기계가 아닌 내 자신이 흘려보내야 한다. 커피 가루의 굵기도 정해야 하며, 물도 흘려보내야 한다. 드립이 어려운 이유, 그리고 모든 잔들이 같을 수 없는 이유다. 저마다 선택하는 굵기와 추출 시간이 달라 어느 하나의 기준으로 설명하기가 꽤나 어렵다. 다만 내 추출로 맛이 변하는 과정을 확인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나에게 맞는 추출 시간을 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