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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민지 Oct 17. 2022

애주가의 알코올중독

어렸을 적 드라마를 보면 다들 퇴근 후에 삼겹살 집에서 소주 한 잔을 마셨다. 소주 한 잔을 털고 껍데기를 우걱우걱 씹으면서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연기를 보고 있으면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저렇게 저녁마다 삼겹살에 소주를 마셔야지 다짐했다. 가끔 공원에서 젊은 주인공들이 농구를 하고 캔맥주를 뜯거나 재벌 회장님들은 고급 바에서 위스키를 마셨다. 하루 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술이었다.


진단을 하고 병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20대에 알코올중독이었다고 믿는다. 그 당시에는 나름 자칭 애주가로 스스로를 응원하며 티끌만한 스트레스에도 소주를 마셨다. 가진 게 없어 서글플 때는 남은 동전을 모두 긁어모아서 생라면에 소주를 걸쳤다. 날이 선 친구의 문자에도, 생각보다 많이 나온 휴대폰 요금에도, 당장 내일 제출해야 할 과제에도 스트레스 받는다는 이유 하나로 술을 찾았다. 그때는 그게 멋이고, 낭만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내 삶이 어느 정도 안정궤도에 진입했을 때도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다. 인간관계에서 지치면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며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자리에 끊임없이 나가면서도 스트레스가 전혀 풀리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든 고마운 시점이 있었다. 술자리에 나가서 웃고 떠들고 오는 것이 스트레스가 된 것이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술자리는 8할이 누구랑 마시는지, 2할이 안주가 무엇인지다. 그래서 회식자리에 가기 싫어도, 메뉴가 한우라면 꼭 참석하는 것이다. 핏기만 겨우 빠진 한우를 순식간에 비워내고 바로 집으로 온다. 반대로 안주라곤 새우깡 하나여도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건 멤버가 좋을 때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술자리마다 조금이라도 텐션이 떨어지면 내가 억지로 애를 쓰면서 웃기고 있거나 술 취한 멤버들이 싸우기라도 하면 싸움을 뜯어말리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고, 어떤 이들은 회사 얘기만, 여자 얘기만, 남자 얘기만 3~4시간을 혼자 떠드는 통에 질려버릴 때도 있는 것이다. ‘훈훈한 분위기’에 ‘짠’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술을 마시는 것이 더는 인생의 즐거움이 되지 않으니 술을 끊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은 3일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타인의 일처럼 자연스럽게 마시게 둬봤다. 대신 술을 마시는 날을 달력에 표시했다. 한달동안 원 없이 마셨다. 달력에 표시된 날을 세니 이틀에 한 번 꼴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부모님에게 하는 안부 전화도 일주일에 한번이면 많이 한 거다. 무엇인가 꾸준하게 이틀에 한 번 하는게 뭐가 있을까? 귀 파기?


나도 모르게 술에 의존을 하고 있었다. 술을 마셔야 하루의 피로가 씻기는 것 같고, 술을 마셔야 고생한 내가 좀 덜 억울한 것 같았다. 아예 끊는다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적당한 횟수에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즐거운 술자리를 가질 방법이 필요했다. 몇 가지 규칙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횟수를 줄이기 위한 첫번째 규칙은 일주일에 금, 토요일 중에 단 하루만 마시기로 했다. 두번째 규칙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술은 스트레스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세번째 규칙은 하이텐션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편한 술자리에서만 술을 마시는 것으로 정했다.


이렇게 규칙을 정하고 술을 마시니 술이 다시 달달했다. 편한 자리에서 일주일만에 마시는 술만큼 반가운 것도 없었다. 일주일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사르르 풀렸다. 맛있는 안주와 소중한 사람들과 술잔을 가득 채워 ‘짠’하는 쨍그랑 소리만으로도 그동안 씁쓸했던 일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이전에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365일을 버텼고, 손과 발이 탱탱 붓고 온 몸이 무거웠다. 술과 거리를 두니 건강검진에서 간수치가 확연히 줄었고, 맑게 깨어 있으니 운동을 하거나 생산적인 일들을 더 할 수 있었다. 술값이 줄어 경제 상황이 좋아진 건 말해 뭐할까? 


이 글을 친구들이 읽는다면 항의할 것 같아 사족을 쓰자면 언제나 규칙은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일주일에 두번의 술자리가 있을 때도 간혹 있다. 그래도 놀라운 것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마시던 술이 일주일에 한 번이 되고,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거나, 컨디션 조절이 필요할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과감없이 몇 주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발전에도 불구하고 애주가의 타이틀은 이상하리 만치 나에게는 낭만적이라 전통주 체험을 하러 가고, 맥주 페스티벌이나 수제맥주집을 방문하기도 한다. 모과, 오디, 사과, 야관문, 원두 등으로 담금주를 만들어서 서늘한 곳에 보관하고 열어야 되는 시기가 오면 예쁜 유리병에 담아 가족 모임이나 친구들 모임에 들고가서 시음회를 한다. 그렇게 스스로 중독자에서 멋진 애주가가 되가는 것 같아 뿌듯함을 느낀다.


스트레스를 술로 풀지 말자. 그런데 속 풀 때는 역시 해장술이다.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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