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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민지 Oct 17. 2022

좋아하는 것들

출근을 해서 직장 상사의 직장 상사 뒷담화를 고막에 때려 박힐 정도로 듣고 나니 마음이 얼얼하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휴대폰을 울리는 미워하는 일에 도가 튼 사람들의 날 선 대화들에 카톡 알림을 껐다. 일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포털사이트 뉴스에 도배된 혐오 가득한 댓글들에 혈압이 오른다. 오늘따라 사회면에는 따뜻한 이웃에 대한 기사보다 ‘먹튀’를 한 가게 손님부터 ‘보이스피싱’피해액이 얼마나 늘었는지, ‘불법촬영물’이 또 유포가 되었다는 당장이라도 욕지거리를 하고 싶은 기사들만 가득하다.


이런 날은 온 몸이 빳빳하다. 주변이 무채색으로 보이고 들리는 모든 소리가 소음인 날. 아무도 나를 때리지 않았지만 먼지 나게 두들겨 맞은 기분.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오늘 하루가 빨리 끝나기를 빈다. 왜 불편한 이야기들은 기적의 퐁당퐁당 논리를 지켜주지 않고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모르겠다.


스위스의 한 교도소는 핑크색으로 도배를 했다고 한다. 수감자의 화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세상이 분홍빛이라면 우리는 좀 더 따뜻하게 살았을까? 내가 마주하는 오늘의 많은 장면들 중 하나라도 핑크색이었다면 나는 좀 더 내면의 화를 다독일 수 있었을까?


이렇게 화가 쌓일 때는 훌쩍 여행을 떠나면 좋겠지만, 꼭 일정도 바빠 오도가도 못한다. 그럴 때면 응급처방을 한다. 바로 빈 노트에 가득 쓰는 것이다. 오직 좋아하는 것들만.


예를 들어서 이런 것들이다. ‘따뜻한 거품 목욕, 육즙 가득한 고기만두, 연두색 새순, 샤워 후 선풍기 바람, 팔도해장국 내장탕, 나무 그늘, 빗소리, 토끼풀 밭, 패러글라이딩, 들국화, 낙엽 밟는 소리, 보라색 바람막이, 양말 손빨래, 함박눈, 양념치킨, 체리 아이스크림, 픽사 애니메이션들, 팟캐스트 비밀보장, 무한도전, 노희경의 드라마, 토마토 주스, 엄마가 만든 닭발, 을지로 골목, 공지천의 노을.’


쓸 때 포인트는 망설이지 않고, 두서를 생각하지 않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좋아하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적어내는지가 스트레스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누가 한마디라도 더 보태면 화가 터질 것 같을 정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좋아하는 것들이 떠오르지도, 써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머리를 짜내면서 써야한다. 일종의 정화의식 같은 것이다. 세상을 다시 아름답게 보기 위해 나를 씻기는 작업.


그렇게 노트를 빼곡하게 채우고 나면 마음이 좀 진정이 된다. 진정이 되면 좋아하는 것들을 쭉 읽고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것들을 하고자 한다. ‘2시간 동안 토마토 주스를 만들고, 팟캐스트 비밀보장을 튼 다음 양말을 빨아야지. 그리고 엄마한테 엄마가 만든 닭발을 먹고 싶다고 연락하자.’같은 하나의 흐름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정해진 계획으로 몸을 움직인다.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채우면 포기했던 하루가 아쉬울 만큼 시간이 빨리 간다. 그리고 세상은 다시 색깔을 갖고, 지금의 나는 조금 말랑말랑해져 있다.


열심히 적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가만히 누워서 곱씹으면 좋다. 토끼풀이 가득한 너른 들판 위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거기에 누워 쉬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휴식이 된다. 좋아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들국화 한 다발 손에 쥐고 나에게 걸어오고 있으면 프로 혐오러들의 펀치들은 솜털에 불과하다. 내 세상에 잠시 흙먼지가 날렸을 뿐 비가 씻어주고 갔으면 하는 마음으로 빗소리 영상을 틀어 놓고 멍을 때린다. 그러고 나면 가슴이 맑고 상쾌하다. 


응급처방을 내리고 나를 좀 달래면 이번 주말에는 무엇을 하면 좋을지, 다음 휴가 때는 어디로 가면 좋을지 같은 것들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또 그것들을 잔뜩 적어 놓는다.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기 위해 짜는 계획에 아이처럼 신이 난다.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한 하루는 과한 욕심 같다. 작은 한 틈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채워줬다면 오늘 하루도 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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