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연예인들의 열애설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소속사가 배우의 사생활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대응하다니 박수가 절로 나왔다. 오 좀 천재인걸? 우리나라는 과거에 옆집의 숟가락, 젓가락 개수를 아는 것이 친한 사이라는 증거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더니, 최근에는 당사자의 동의는 가볍게 무시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오픈하여 다 같이 관람한다. 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여부를 떠나 과도하고 불쾌하다. 사촌이 땅을 샀는지, 건물을 샀는지, 대출은 얼마나 꼈는지를 속속들이 알아야 속이 시원한 대한민국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묻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긴 이 나라는 중요한 개인정보도 이미 모두의 정보가 되었다.
명절이 되면 친척들과 함께 오손도손 담소를 나누던 때는 지나간 것 같다. 누가 누가 더 무례한지에 대한 대결을 펼치듯이 질문과 회피의 오징어 게임을 보는 것 같다. 대학은 어디에 붙었는지, 취업 준비는 잘 돼 가는지, 어디 회사에 취직했는지, 애인은 있는지, 결혼은 언제 할 건지, 애는 몇이나 낳을 건지 등에 대한 질문 폭격이 시작되면 심호흡을 하고 준비된 답변을 읊는 수준으로 대응한다. 그래도 질문의 끝은 보이지 않고 준비된 답변은 고갈될 때쯤에는 국민청원을 올리고 싶다. 국가 유일의 긴 휴가인 명절을 없애달라고. 오죽하면 칼럼 <추석이란 무엇인가?>는 불쾌한 명절을 경험한 많은 이들에게 환영을 받았을까?
그런데 사생활의 경계선에도 문제가 좀 있다. 개인마다 사생활이라고 생각하는 범위가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결혼, 자녀, 자가, 자차 등의 질문이 불편하지 않겠으나, 누군가에게는 아니다. 또한 사생활 공개 범위도 상대에 따라 달라진다. 나의 애인을 내 친구들에게는 이야기할 수 있어도, 내 직장 동료들에게는 이야기하기 싫다(이렇게 쓰니까 꼭 애인이 있는 것 같다.ㅎㅎ). 그리고 기혼자들은 결혼 여부에 대한 질문이 사생활의 영역으로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결혼을 못했거나 안 할 사람들에게는 곤혹이 따로 없다. 왜냐면 꼰대들은 반드시 왜 못했는지(안 하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소개팅에서 나이를 묻는 것은 무례하지 않더라도, 길에서 어깨 부딪힌 사람이 다짜고짜 ‘너 몇 살이니?’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다. 사생활에 대한 질문들은 자세히 들어보면, 꼭 전투력을 측정하는 것 같다. 삐빅! HP500. 전투력 낮음.
사생활에 대한 무례한 질문들이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모르고 그랬을 무지 때문이다. 나도 이런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 김 OO과 교실 뒤편에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데, 그 친구의 필통 안에 ‘박 OO’ 이름표가 붙여진 딱풀을 꺼냈을 때였다. 내가 박 OO이 누구냐고 물어보니, 친구 김 OO은 오빠라고 했다.
- 근데 왜 박 씨야? 너는 김 씨잖아.
- 오빠는 박 씨야.
- 왜? 너는 김 씨인데? 원래 가족은 같은 성을 써.
- 너네 엄마도 장 씨냐? 가족마다 성이 다를 수도 있어.
- 아니야. 형제, 자매는 성이 같아.
고작 10살이 형제, 자매가 성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을까? 나는 무례하게 집요했다. 결국 그 친구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나오고, 눈물이 그렁그렁 해질 때까지도 뭐가 잘못 됐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살면서 내가 했던 질문들이 언제나 교양 있었을까? 이 사건 외에도 사람들의 숨기고 싶은 연애사, 가정환경, 재산 등에 대해 캐물어본 적이 있었겠지. 그때는 몰랐겠지만 몰랐다고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이 페이지를 빌어 사과한다.
말을 뱉은 사람은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많지만, 뇌리에 박힐 정도의 말을 들은 사람은 잊지 못하고 계속 기억하게 된다. 동네 닭발집에서 닭발을 맛보고 입맛에 잘 맞아, 4번 정도 방문했을 때 일이다. 닭발을 포장해 달라고 전화하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새우깡, 하리보 젤리 같은 것들을 잔뜩 사서 닭발집에 들어갔다. 사장님이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셔서 나는 모퉁이 테이블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 무슨 과자를 그렇게 많이 샀어요? 아기 먹일 거예요?
- 네? 아… 네.
나는 미혼이고, 새우깡을 먹을 수 있는 애기가 있을 수 있는 정도의 나이다. 다신 그 닭발집에 가지 못했다. 애기 잘 크고 있냐고 하면 할 말이 없기에.
사장님의 지레짐작형 친절한 질문이 악의는 없었지만, 들은 나는 어딘지 모르게 슬퍼졌었다. 그런데 슬픈 감정이 오히려 나은 건가 싶게 황당한 일도 있었다. A팀장님은 50~60명 정도 되는 팀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처음 팀장님을 만났을 때 ‘어디 사세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세요?’ 같은 질문들을 해주시는 자상한 분이라고 느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회식이 될 때까지도 팀장님은 나만 보면 ‘어디 사세요?’, ‘민지 어디 살아?’라고 질문하셨다. 나는 매번 똑같은 내 집 주소를 말씀드렸다.
어느 날 출장 후 늦은 퇴근을 하는 길에 팀장님이 집 근처에 데려다준다고 하셔서 냉큼 차에 탔다. 그리고 일곱 번째 ‘집이 어디지?’라고 물으시는 바람에 소리를 악 지를 뻔했지만, 우리 집 위치를 일곱 번째 알려드리고, 무사히 집에 올 수 있었다. 팀장님이 60명의 팀원이 어디에 사는지를 다 아실 필요는 물론 없다. 하지만 궁금하지도 않은 집 위치를 일곱 번째 묻고, 물은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니 어쩐지 우리들이 나누는 모든 질문과 답변들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그런 생각도 했다. 팀장님용 회식 매뉴얼이 존재하고, 사생활을 터치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회식자리 BEST 질문 리스트를 팀장님들끼리 공유할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
그렇다면 상대방을 배려하는 좋은 질문이란 무엇일까? 무례한 질문, 지레짐작하는 질문, 답변을 기억하지 못할 의미 없는 질문들보다 나은 질문을 할 수 있는 방법. 끝없는 고민 속에 반대로 생각해 보니 내가 듣고 싶은 질문에 답이 있었다. 안녕하시죠?
우리는 그저 인간이며, 지구에 살며, 누군가의 뱃속에서 태어나 오늘은 누구와 사랑을 할 수도, 이별을 할 수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저 먼 우주에서 보면 먼지 같은 것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타인에게 해야 하는 질문은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요즘 행복한지, 힘든 것은 없는지, 건강한지…그래서 안녕한지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