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말했다. 원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다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3년 전, 위내시경 검사 중 우연히 발견된 조직에서 암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별다른 치료 없이 추적 관찰만 하기로 했고, 중증환자 등록도 마쳤다. 그런데 이기적인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도 엄마와 함께 순장을 해달라는 웃지 못할 유머를 남겼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야! 인명은 제천이고, 나는 당신 소유물이 아니야. 그런 농담하지 마!"
이것만 봐도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수준 떨어지는 농담으로 식구들을 기겁하게 하는지 알 수 있다. 모두 조용하고 순한 사람들이라 건드리지 않을 뿐이다.
어릴 적, 오빠가 일하고 받은 월급을 아버지가 몇 년간 다 써버렸다. 허무함을 느낀 오빠가 아버지에게 따지듯 물었다. "돈을 어디다 쓴 거예요?"
그 순간, 작은 밥상에 밥을 먹던 아버지는 발등으로 가볍게 밥상을 걷어 올렸다. 밥상이 천장까지 솟구치는 장면을 슬로모션처럼 바라봐야 했다. 게다가 이단 옆차기로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아버지를 보며, 오빠는 살짝 어깨를 틀어 피해 갔다.
사실 너무 웃기고 황당한 모습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오빠가 불쌍했다. 그때부터 오빠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오빠가 더 이상 희생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오빠는 나름대로 효도를 하기 위해 부모님 곁을 지켰고, 지금도 부모님 옆에 계신다. 나는 이제 오빠에게 늘 당부한다. "너의 인생을 살아."
새언니나 오빠가 부모님께 평생의 효도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우리 아버지가 존경받을 만한 위인인가? 그저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딱 그 정도의 예우를 할 뿐이다. 매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올해 아버지 나이가 일흔아홉, 1947년생이고 엄마는 여든, 1946년생이다. 가을에 가장 둥근달이 뜨는 날, 그날 엄마가 태어나셨다.
엄마는 여든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요양보호사로 일하신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주고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발버둥 치신다. 또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나갈 곳이 있다 보니, 79년 동안 3고(고혈압, 고지혈증, 당뇨)를 앓지 않으셨다. 올해 들어서야 의사의 권유로 혈압약과 당뇨약을 늦게 드시게 되었다.
반면 아버지는 먹는 욕구가 지나친 사람이다. 그저 뱃속에 걸신이 들렸다 할 정도로 식탐이 많다. 아버지는 중국, 루마니아, 베트남에 주재원으로 근무했으며, 유럽의 신기술을 답사하며 세계 여러 곳을 다니셨다. 그는 자기가 쓰는 돈이 부족하여 가족들 돈까지 싹 빨아다 사업에 투자했고, 돌아온 것은 빈털터리였다. 그런 그가 원 없이 살았노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엄마가 식당 주방 보조 일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스킨스쿠버, 다이빙 등 취미 활동을 했다. 보트를 소유하고 낚시를 하며 거침없이 사나이로서의 방랑을 일평생 했다.
엄마는 옷이 누더기가 될 때까지 기워 입고, 화장품이라는 것은 단출한 것뿐이었다. 여전히 재래시장에서 만 원, 오천 원짜리 옷을 사 입는다.
엄마와 아버지는 완전히 다른 사람, 다른 삶을 살고 있는데 왜 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늘 집에 부재중이던 아버지가 60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방랑의 삶도 돈이 따라와야 가능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용해 줄 회사가 없었던 것이다.
간간이 기계 고치는 일로 용돈을 벌다가, 이제 그마저 늙어 나이가 드니 엄마 옆에 딱 달라붙어서 밥 세끼 꼬박 먹고 노후를 보내고 있다.
아버지와 엄마를 보면 노후를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에 점차 다다른다.
아버지는 60살에 당뇨를 처방받았다. 당시 100kg 넘는 거구였으며, 중국에서 기름진 음식으로 2년 정도 보내다가 당뇨 판정을 받았다. 그 이후 20여 년을 꾸준히 당뇨약을 드신다. 그는 엄마보다 한 살 어린데도 이제는 눈에 띄게 엄마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인다.
엄마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일부러 걸으며, 몸을 한시도 쉬지 않고 돌린다. 그녀가 불행한 삶을 살았을까? 이제는 아니다. 엄마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버지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녀를 쉴 수 없이 계속 움직이게 하는 폭발적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가? 생존 본능을 일깨워주는 사람이 아버지다.
엄마를 이해하게 된 것도 양귀자의 『모순』을 읽다가 깨닫게 되었다. 소설 속 안진진의 아버지가 행방불명자가 되어 본성만 남아 돌아왔을 때, 안진진의 어머니는 누구보다 더 삶의 애착을 보였다.
이제는 누구의 탓도 아니다. 이것이 인생이구나 싶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삶의 애착을 어떻게 가지고 살아가느냐는 나에게 달려 있다.
뒤늦게 맞이하는 엄마의 생일, 팔순이다.
더구나 엄마의 생일날 나의 강아지가 하늘로 갑자기 떠나가 버렸다. 내 강아지는 나의 품에 채 3년도 있지 못한 채 갑자기 떠났고, 그날이 엄마의 생신이었다.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을 만큼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괜찮다. 나는 괜찮으니 네 마음을 잘 추슬러라. 네가 얼마나 이뻐한 강아지인데, 그 작은 녀석이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것이 눈에 선하다. 네 마음을 잘 추슬러라. 엄마 생일은 지나쳐도 괜찮다."
엄마는 대자연이고, 위대한 여신이다. 나는 엄마에게 오히려 따뜻한 위안을 건네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변변치 않은 자식들과 늘 고마고마한 삶을 짐작하리만큼 억척스럽게 산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팔순을 지나치다니!
나는 언니와 다시 의견을 모으고 연말에 큰 파티를 열 계획을 세웠다. 늦었지만 엄마를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퀸으로 만들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연회홀을 대여하고 뷔페, 메이크업, 헤어, 사진사, 사회자, 의상 대여, 선물 모든 것을 준비했다. 나는 엄마에게 이 정도 돈을 들이는 데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오빠와 새언니에게는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가벼운 선물만 준비하라고 했다.
모든 비용은 내가 대기로 하고(몇 년 전부터 조금씩 모아둔 돈이 있었다), 언니가 파티 진행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양복을 입게 하고, 꽃 코사지로 양복을 빛나게 해 줄 참이었다.
엄마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담아 영상을 제작하려고 했다. 모든 것이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언니와 함께 사진을 고르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다음 날 저녁,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때문에 화가 난다는 말이었다.
아버지는 앨범을 외상으로 사 와서, 엄마와 우리 가족이 있던 어린 시절부터의 사진들을 모두 분쇄기에 간 것처럼 가위로 난도질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사 온 앨범에는 고작 20장의 사진밖에 없었다. 나의 결혼식 사진부터 어릴 때 사진까지 모두 가위로 오려버렸다.
느닷없이 사진을 정리한다는 걸 보니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초기 치매인가? 아니면 엄마의 팔순 파티 준비에 대한 시샘인가?
다음 날 아침, 엄마는 아버지에게 큰딸이 너무 슬퍼 울었다는데 왜 사진을 다 버렸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있던 앨범마저 다 갈기갈기 찢어 놓겠다고 했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며 앨범을 숨기고 말겠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언니에게서 전해 들었다.
사진은 사실 필요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 식구들에게 유일하게 남은 추억마저 앗아가는구나 싶었다. 오빠는 이 사실에 덤덤히 반응하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라면 그러고도 남지."
나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정신없이 아버지를 달랬다. 어떻게 하면 그가 진정이 될 것인가. 아버지는 앨범에 대한 사건을 조용히 고백했다. 엄마에게 협박을 했다고도 했다.
아버지는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올 것이 두려웠다. 그는 한층 더 마음이 편안해졌고, 다시 엄마와 언니에게 상냥한 아버지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는 참 아버지가 어렵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닮을까 봐 두렵다. 적어도 자녀들에게서 존중하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세상에 "우리 아빠 너무 존경스러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나에게 아버지는 그저 불쌍한 남자로 보인다.
사람은 자꾸 익숙한 곳으로 가려고 한다. 생존 본능 때문이다. 사람은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익숙한 것들을 해야 안심한다고 느낀다.
하지만 인간은 그 반대되는 것을 해야 산다. 편함을 누릴수록 우리 몸은 면역력이 약해지고 근육이 사라진다. 과식을 하면 속이 상하고 혈관도 좁아진다. 우리의 욕구대로 살다 보면 그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좋은 것들이 사라진다.
정신도 마찬가지다. 싫은 소리 듣기 싫다고 거부하고, 남의 이야기 듣지 않고 존중도 하지 않으면 고립된다. 열려 있는 사고가 되도록 끊임없이 스스로 열린 자세로 살아야 한다. 태도가 곧 정신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당신의 태도가 다정함으로 인해 정신까지 부드럽게 되길 바랄 뿐이다. 나이 든 노인이 협박을 해서 무서운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 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