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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크 Oct 04. 2024

행복한 우리 집

시댁은 나와 또 다른 세계관에 있다. 

보미씨의 20여 년의 결혼생활에서 슬픔과 불행, 인내와 행복, 용서와 화해, 미안함과 고마움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해소되지 않은 해묵은 감정을 털어내고자 용기를 내어 과거를 꺼내어본다. 


아마도 긴 결혼생활동안 함께 했던 경험들로 발판 삼아 앞으로 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설계할 것이다. 


상당히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갈 때만 해도 보미씨는 낮은 자세로 겸손하게 삶을 배우고자 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아서 집안살림부터 어른으로서 정숙한 태도를 시부모님께 배워가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보미씨는 자신이나 시댁 어른들이나 모두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이 있음을 알았다면 좀 더 맘이 아프지 않고 더 잘 살았을까? 만약 보미씨가 좀 더 자신만을 챙기고 눈치를 보지 않은 성격이었다면 결혼 후 20년 동안 뭐라도 더 재물이나 성취감이나 커졌을까?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해 수습을 하고 이제 다시 보미씨의 삶을 정비하고자 그녀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머릿속에 지워버린다. 



시댁의 세계관은 보미씨가 이제 것 살아왔던 가치관과 완벽하게 달랐다. 보미씨가 자라던 환경은 가난하고 억눌린 서민의 밑바닥이었기 때문에 시댁이란 풍요로운 울타리에 소속되고 싶었다. 그만큼 충성을 했고 시어머니껜 여자가 희생을 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다. 


그녀는 보미씨가 한없이 못 미더웠으며 장남이자 사랑하는 첫사랑 같은 아들을 빼앗김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물론 누나들도 막 결혼한 남동생에게 보미씨 앞에서 보란 듯이 팔짱을 끼며 연인처럼 살가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우리의 특이하고 착한 보미씨의 눈엔 순한 바보처럼 그냥 의좋은 남매인가 보다라고 지나쳤지만 글쎄 이제와 보미씨는 돌이켜보니 그녀들의 성품을 보곤데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보미씨가 하는 것은 가정교육을 못 받았고 촌스러우며 성격이 괴팍한 며느리이자 올케로 자리 잡혔다. 

둘째를 낳고 한 달이 안된 아기를 데리고 먼 지방까지 명절을 지내러 갈 때 보미씨는 

' 이때만이라도 아기와 내가 장거리니까 움직이지 않고 집에 있으면 안 될까? '생각을 했더란다. 


시어머니께 어렵사리 부탁을 했고 시어머니는 명절에 음식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보미씨 집으로 왔다.

생후 한 달도 안 된 아기를 돌보며 차례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던 보미씨에게 명절 쇠로 온 큰 시누가 다가와 가슴에 박힌 말을 꽂는다.


"꾀부리다가 된통 당했네?"


큰 시누가 지나가듯 한 말은 보미씨가 머리 굴리고 명절을 안 보내려고 시어머니께 꾀를 부리려다가 그만 시어머니가 보미씨 집으로 왔으니 쌤통이다라는 의미로 해석이 되었다.  그럼에도 보미씨에겐 시댁에 대한 자신의 체념을 받아들인 상태라 마음 곱게 넘어갔다. 


몇 년 후 같은 나이의 보미씨 동서가 임신 만삭이라고 명절에 쉬게 해 줬다는 시어머니의 행동에 보미씨는 서운한 감정이 들어섰다. 


시어머니는 늘 보미씨에게 큰며느리로써 '큰 며느리 자리는 도망가더라도 도망갈 수 없는 자리다. 그 자리는 마음을 넓게 써야 하고 남들보다 더 큰 양보와 이해심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하셨다. 


보미씨는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구나 싶었다. 노력을 해서 좋은 가정을 꾸려야지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시어머니는 그때 보미씨가 아이를 낳고 한 달도 안 된 그 명절에 보미씨 집에서 명절 쇠러 가길 참 잘했지 하고 말씀하신걸 다시 듣고 보미씨는 후회가 들었다.


'내 속 이야기를 진실되게 전할걸.. 아니요, 저는 정말로 싫었어요. ' 하지만 그녀는 그저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보미씨가 바라본 시댁은 '다른 사람들은 허용하지만 안 돼' 심하게 적용되었다. 


남편 또한 '우리 누나랑 사이 안 좋으면 난 너랑 이혼할 거야. 나에겐 혈육이 중요하니까."라고 못 박아 두었으니까 보미씨는 능력이 없고 친정도 가난하고 도망갈 데가 없으니  참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어리석은 보미...)


하지만 시간을 버티는 자가 이긴다 하였던가..

20년이 흐른 보미씨는 달라졌다. 그녀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생각을 말할 용기가 생겼다. 시댁에 불합리한 말은 이제는 참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이혼을 하면 시누가 당신과 살아줄 것 같은가? 어머니가 당신과 살아 줄 것 같은가? 평생을 같이 갈 사람을 생각하고 냉정하게 판단을 해보라. 당신 등 간지러울 때 긁어줄 사람이 누구인지. 그건 시누들도  남동생을 선택하느니 자신의 남편이나 자기 가정을 선택할 것이다. 어머니는 우리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할 사람이지 당신을 챙겨주고 살아줄 사람이 아니다. 당신 옆에 진정으로 챙겨줄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라. 가장 가까이 혈육보다 더 오래 함께 살아온 당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당신 반려자이다." 


보미씨의 남편은 얼굴이 붉혀지며 과거에 너를 이기려고 막 쏟아낸 말을 두고두고 기억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버전으로 자신의 선택은 배우자임을 고쳐먹는다. 


보미씨는 여전히 시누들은 가부장제를 벗어나고자 노력했으면서 왜 남동생 아내들에겐 가부장제의 틀을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녀들이 시댁에 가서 행사를 참여하고 며느리로서 시어른께 자주 찾아뵈는 건 본 적이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이중성이다.  세상엔 인간들의 모순 때문에 재밌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기도 한다. 더구나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란 말처럼 본인들의 과거에 행했던 행동과 말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 늘 자신이 옳고 정답이라는 확신에 찬 모습들이 알고 보니 인간의 뇌가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에 보미씨는 이제야 알았던 것이다. 


과거에 저 사람이 틀렸던 맞았던지 간에 오늘의 보미씨는 이제 과거의 보미가 아니다. 그럼에도 모순덩어리의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  그들이 심겨준 시댁의  사고들- 물론 그들 가족울타리에서 보미씨에게 세뇌를 시켜야 했을지도 모를 그 사고들은- 결국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갔고 보미씨 또한 억울하겠지만 그렇다고 썩 나쁜 인생을 산 것도 아니다. 


가정 안에서 희로애락오육애를 느꼈으니 지금의 보미씨로 성장하지 않았나. 보미씨에겐 다만 그들처럼 자신감 넘치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 성향이 부러울 뿐이고 그들의 행동에 대한 오류는 여전히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기에 이제야 보미씨는 안다. 

 모두가 모순덩어리고 보미 자신도 실수해도 괜찮다고, 미움받아도 괜찮다고.


보미씨는 자신을 향해 맘속으로 외친다. 

 "눈치 보지 말고 쫄지 말고 살자."



마지막으로 성격이 운수를 좌우한다는 코르넬리우스 네포스(로마 역사가, 저술가)의 명언을 보미씨는 노트에 끄적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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