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ple, healthy, tasty
요리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기준은 simple, healthy, tasty의 요건만 맞추면 좋은 요리라고 생각한다.
요리는 손맛에 따라 좌우되며 타고난 손맛과 센스도 재능이다.
나는 요리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께 꾸지람과 반복 연습을 거치며 조금씩 실력을 키워왔다.
계란프라이 겨우 할 정도로 요리에 관심이 없던 나는 가정을 꾸리면서 결국 요리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요리 실력을 늘리고자 요리 교실에 다니거나 요리책을 종종 구입해서 읽곤 했다.
그럼에도 요리에 대한 센스는 노력에 비해 쉽게 늘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도전한 끝에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들게 되었고, 이제는 그 음식을 담을 그릇까지도 눈이 넓어졌다.
어릴 때부터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배가 고파 전기밥솥에 남아있는 수분이 거의 날아간 밥을 퍼 담고, 냉장고에서 작은 김치통을 꺼냈다. 이미 시어 빠진 김치는 여러 번 열고 닫아 고린내가 풍겼고, 나는 그것이 김치 본연의 맛이라 생각했기에 꾸역꾸역 참고 먹었다. 작은 상을 펼쳐 김치를 놓고, 찬장에서 조미김을 꺼내 밥과 함께 먹었다. 간식거리가 부족했던 나는 밥과 김치, 김만으로도 맛있게 한 끼를 해결했다. 나는 간식을 거의 먹을 수 없었고, 음식에 대한 흥미도 크지 않았다. 그런 내가 요리를 시작하려니 해안가 출신 시어머니는 주꾸미 손질법, 생선 손질법, 해산물 요리법까지 전수해 주셨다.
주꾸미 대가리를 확 벌려 먹통과 내장을 제거한 후, 소금물에 바락바락 씻고 보글보글 끓는 물에 넣어 오그라질 때까지 저어가며 탄력을 잃지 않게 데쳤다. 어머니는 초장 양념을 만들어 맛있게 무쳐주셨지만, 나는 그 양념 비법을 제대로 따라 할 수 없었다. 먹어본 놈이 장 맛을 안다고 하지만, 나는 입맛이 무던하여 웬만하면 전부 맛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육아까지 병행해야 했기에 초고속으로 요리를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식재료를 소분해 냉동고에 보관하고, 간단하면서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면서 신선한 재료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냉동 주꾸미로 요리하면 "질기고 냄새 나서 못 먹겠다"라고 고집을 부리는 시댁 식구들 때문에, 재료는 항상 살아 있거나 기절한 것으로 준비해야 했다. 그렇게 재래시장에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신선한 식재료를 골라내는 기술이 생겼다.
시댁 식구들을 관찰해 보니 모두 자아효능감이 넘쳤다. 나와는 정반대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요리를 대하는 태도도 비교하게 되었다. 맛있는 음식을 차려서 함께 앉아 먹는 모습, 이것이 바로 그들의 정서적 안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다.
반면 나는 각자 알아서 먹는 분위기에서 자랐고, 엄마의 입맛대로 강요당하며 살았다. 엄마는 김치 없이는 밥을 먹지 못하는 김치 예찬론자였고, 단백질 공급이 필수인 우리 남매에게도 김치만을 강요했다. 그 결과 나는 키가 더디게 자랐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야 겨우 반찬에 고기를 추가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다. 결국 대학 시절까지 성장해 평균 신장에 도달했지만, 유전인지 환경인지 그 원인은 알 수 없다.
시댁에서 배운 것은 맛있게 조리하는 법, 플레이팅 하는 법이었다. 김치 담그기, 탕 끓이기, 제과까지 다양한 도전을 해보았다. 지금은 오븐을 없앴는데, 노동 시간을 들이는 것보다 가끔 사 먹는 것이 재료비를 아끼고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음식은 최대한 심플하고 빠르게 조리하는 방식으로 변했고, 그 결과 입맛도 담백해졌다.
어릴 때 정말 좋아했던 영화가 있다.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그린 파파야 향기』이다. 주인공 무이는 하녀로 들어가 숙식하며 요리법을 배우고, 자라면서 더 맛있고 다채로운 요리를 만들어간다. 그녀의 요리는 풋풋한 색감과 향을 지닌 그린 파파야처럼 신선하고 순진한 감성을 담고 있다. 영화 속 플레이팅 장면에서 받은 신선한 충격은 내게도 영향을 미쳤다.
현실주의자들은 우울한 감정을 더 자주 느낀다고 한다. 맛있는 한 끼를 먹는 것이 우울증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은 단순히 영양 섭취의 의미를 넘어선다.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관계가 깊어지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며 정서적인 교감을 쌓을 수 있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나 동료와 함께하는 식사는 신뢰를 형성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요리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자체가 우리의 정신 건강과 사회적 유대감을 높이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딸아이가 중학교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 은따(은근히 따돌림)를 당해 힘들어할 때, 내가 신경 써준 것은 음식이었다. 아이가 맛있는 것을 원하면 함께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러 다녔다. 직접적인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결국 고등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고, 음식의 즐거움을 함께 경험한 것이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는 내 요리를 좋아하지만 결코 자랑할 만한 실력은 아니다. 다만 이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1. 요리학원을 다녔고,
2. 요리책을 많이 읽었으며,
3. 묵묵히 시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고,
4.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려 노력했고,
5. 시행착오를 겪으며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이렇게 노력해도 어쩔수 없이 요리는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능까지 아니어도적어도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기왕이면 맛있게 차려 먹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좋기에, 누구나 맛있게 요리를 해서 차려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