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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느려도 괜찮아. 나는 나만의 속도로 산다.

그래 시작은 했나요?

by 바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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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려도 괜찮아. 나는 나만의 속도로 산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속도가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말 귀를 잘 못 알아먹거나 상상 속에 갇혀 사느라 느려도 한참을 느렸다.

글씨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대로 쓰다 보니 왼손잡이가 되었다.

타고났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글씨는 마주 보는 친구를 그대로 흉내 내다보니 왼손으로 쓴 것이 시작은 맞다. 어쨌든 학습도 나는 너무 느렸다.

저능아 수준은 아니었지만 초등학교 때 글을 어떻게 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과서를 바라보고 이해하는데도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3학년 때까지는 칠판을 보고 숙제를 하고 얌전한 어린이였지 생각이라는 것은 아예 안 하고 산 듯하다. 4학년이 되자마자 친구들을 바라보고 친구들이 하는 대로 행동을 따라 했다.

전과를 보는 친구, 문제집을 사서 푸는 친구들을 보면서 나를 보고 있자니 나는 교과서와 노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와 경쟁을 하는 친구가 생기면서 그 친구에게 지기 싫어 문제집을 한 권 샀다.


이때 주변을 관찰하니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들은 다들 수업 끝나고 학교에 남아있었다.

중간고사가 곧 앞두던 시기였고 나는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구들이 곧장 집으로 가지 않는 사실에 놀라웠다.

아무도 남으라는 소리를 안 했지만 나도 그 친구들처럼 학교 수업 끝나고 남아 보기로 했다.


선생님은 개인 업무를 보고 계셨고 아이들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신기해서 얼마 전 사 온 문제집을 놓고 한 자 한 자 읽었다.

사회과목을 특히 좋아해서 잘 모르는 단어들이 생소하지만 재미있게 문제집을 풀었다.

복습이나 예습이란 개념조차 몰랐다. 공부하는 요령도 몰랐다.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했던가? 운 좋게 사회시험에서 1개만 틀렸다.


경쟁하는 친구는 질투심에 폭발했고 나는 스스로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최초의 승리였다.


아주 우연히 신이 내게 준 달콤한 선물이었다.

노력에 비해 점수가 상당히 잘 나왔지만 기말고사 때 다시 한번 같은 방법으로 학습해 보기로 했다.

문제집을 다시 사서 풀고, 이번엔 전과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나는 많이 느린 아이인데도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지 않다고 안심이 되었다.

칠판의 글씨가 무슨 뜻인지 느끼고 학급 친구들을 보며 무엇이 애들이 좋아하는 행동인지 싫어하는 행동인지 눈여겨보기 시작했으니 나는 주류에 끼어들기로 결심했다.

초등 5, 6학년은 나름 열심히 생활했고 중상위 성적을 유지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뛰어갔다.


“엄마, 나 시험에서 6개밖에 안 틀렸어!”

그런데 엄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별 감흥도 없는 듯했다.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공부를 잘해도 못해도, 아무도 관심이 없구나.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국영수가 중요하다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웠지만

뜻대로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우리 때는 인문계, 실업계로 성적순으로 학교를 가르는데

솔직히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겨우 중상위권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이때는 좋아하는 소설을 마음껏 읽고, 그림도 실컷 그렸다. 평생친구도 만났다. 공부에 치여 살았지만, 되돌아보면 그 시절이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진학하면서 정말로 공부에 손을 놓았다.

이건 아무리 해도 안 오르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공부의 요령이 너무 없거니와 주입식 교육, 깜지, 무조건 원리를 알기 전에 외우기부터 했으니 이건 정말 나의 잘못이 크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엔 무식하게 공부해서 득 보다 실이 많았고 미대에 진학할 수 없는 가정환경 때문에 우울한 3년이었다.

영어는 아무리 외워도 지문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학원은 다녀본 적이 없었고 교육방송으로 공부하는데도 나의 머리는 늘 딴생각으로 가득 찼었다. 그러다가 대학을 들어왔는데 여전히 나는 뒤떨어지고 느린 사람이라 생각했다.

장점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것, 영어를 꼭 잘하고 싶다는 목표가 있다는 것.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하긴 했으나 기초에 항상 머문다는 느낌이었고 영어가 도대체 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때 배낭여행, 어학연수 열풍이 불면서 저축한 돈 얼마를 가지고 호주로 영어 공부하러 가게 된 것이 큰 효과를 보게 되었다.

영어 따위 공부란 책을 가지고 계속 들여다봤자 독해만 될 뿐 입 밖으로 나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영어가 단순히 공부가 아니라, 삶의 도구라는 걸 깨달았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단어를 익히며, 학창 시절과는 다른 방식으로 배워갔다.


영어를 익히게 되면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임기응변이 가능하다.

친구네 가족과 해외여행을 갔는데 그 집 아이가 불미스러운 사고가 났었다. 당시 비상상황이었고 영어에 자신 있다는 남편은 하필 리조트에 없었다. 아이가 겨우 심폐소생술로 일어나서 나는 리조트 닥터를 만나고 닥터의 조언을 들어 그 나라의 큰 대학병원에 택시를 타고 갔다. 그리고 다시 검사를 위해 절차를 밟고 병원 원무과 행정원, 닥터, 간호사를 만나서 x레이를 찍고 이야기를 나누웠다.

느릿느릿하지만 의사소통은 가능했고 아이는 괜찮다는 말에 그 길로 기분이 좋아져서 돌아오는 길에 운전수도 간호사도 나도, 아이와 아이 엄마도 신이 나서 재래시장에 들러 망고스틴을 많이 사서 함께 나눠먹었다.


영어가 기질을 발하는 순간, 위기 때 나는 뇌 속 어딘가에 박혀있던 단어들이 순간순간 튀어나왔다.


언어 수준이라는 게 초등학생 수준밖에 안 되지만 나는 내가 영어를 못하는 것, 발음이 안 좋다는 건 개의치 않다. 의사소통이라는 도구로써 유용하면 그만이었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내 앞에서 영어회화로 우쭐대던 남편이 인종차별과 큰 사건 앞에서 침묵을 했다. 나를 바라보더니 나처럼 영어에 서툴러도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사실 남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나는 상당히 서툴고, 유창하지 않다. 그러나 침묵을 하는 것보다 낫지 않는가? 다들 공부 꾀나 했다는 사람들은 오히려 무식한 내 뒤에서 옹졸하게 숨어있었다.


그렇게 회사 일도 가정 일도 나는 많이 서툴렀다.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만 왜 그렇게 미련했을까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런데 꾸준히 하는 사람 못 이긴다고 돌이켜 보니 나는 어느새 제법 사회에 한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나름 손재주로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고 크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이다.

남들이 보면 대단하다 소리도 듣지만 전혀 아니다.


다만 나는 좀 일찍 깨달았으면 혹은 주변에 가족들의 도움이나 멘토가 있었다면 나의 삶도 좀 더 좋아졌을까? 궁금하긴 하다. 나는 여전히 내가 느리다고 느끼니까 아마도 여전히 헤매고 있을 테지만. 내 환경이 나를 온전히 지지해 줄 가족이 없거니와 응원하는 사람도 없다.


아이 엄마이고 한 사람의 아내이다 보니 나 자신보다 식구들 챙기는 게 우선이다. 그러다 보니 안 그래도 느린 사람이 몸도 늙어가서 자꾸 시간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느려도 괜찮다고 믿는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속도가 있고 꾸준함이 결국 결과를 만든다. 운명도 결국 내가 쌓아온 선택과 행동의 결과일 뿐이다.

운명이라는 것도 결국 인과의 법칙일 뿐이다.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것은 과거의 내가 걸어온 길 덕분이다.


그러니 꾸준히 하다 보면 속도가 자연스레 붙게 된다. 그 속도에 올라 탈 타이밍에 맞추기 위해 우리는 꾸준히 발열을 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자동차의 시동을 켜서 몇 분 동안 기다리는 것은 엔진을 과열시켜야 윤활유가 잘 돌아가며 매끄럽게 작동이 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운동을 하는 처음 20분 동안은 우리 몸은 열을 내느라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데 그 이후로는 지방이 연소되면서 자연스레 항상성을 유지하여 꾸준히 지속할 수 있도록 한다.


느려서, 말 귀를 못 알아먹어서, 주눅 들어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정말 하나라도 해보는 것이 낫다.


이 세상에 이치를 좀 더 빨리 깨달았다면 나는 달랐을까?

형제, 자매들은 나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 있고 행여 나에게 누가 될까 연락조차 안 하는 부모님을 두고 나는 어디에도 하소연을 할 수가 없었다.


꽉 막힌 방 안에서 나는 계속 문을 두들기고 망치로 깨며 밖을 나왔는데 이미 반백 살이 되고 말았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보니, 세상은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더디지만, 멈추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의 빅데이터를 쌓아야 한다. 데이터가 쌓이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다. 그것은 속도와 전혀 관계없다. 느려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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