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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설 데미안을 통해 깨달음

나는 왜 이토록 주눅이 들어 있었을까?

by 바크


나는 왜 이토록 주눅이 들어 있었을까?




나는 오랫동안 알 속에 갇혀 있었다. 부모의 말, 시댁의 기대, 남편과 아이들 앞에서의 나. 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내 알을 깨뜨려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데미안을 읽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깨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구나. 새는 언젠가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나는 이제야 그 투쟁을 시작한다.


어릴 때부터 하지 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돈이 없다고 했다.

문제집을 사고 싶어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학용품이 필요해도 돈이 없다고 했다. 육성회비가 밀려서 내야 한다고 하니 아버지는 남일처럼 대답했다.


“네 담임께 네 아버지 돈 없다고 해라.”

돈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운지를 몰랐던 어린 나는 담임께 달려가 그대로 전달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은 절대 권력처럼 느껴졌다. 매번 하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공부하면 돈이 드니까 교과서로만 공부할 것이고 학원과 급식은 꿈꾸지 말 것이며 대는 대로 대충 살아가라고 했다.



어린 나의 눈에서도 아버지는 돈을 번다고 저렇게 나가면서 왜 집에 돈이 쌓이지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자라면서 깨달았다. 부모가 단순히 가난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난을 대물림하려 했다는 것을...


남자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넌 신기해, 왜 너는 꿈이 없어?”

그런 질문을 한 남자친구를 보니 당황스러웠다.


매번 조심스레 내 꿈을 이야기할 때마다 부모님은 거절했고 적당한 대학교 나와서 적당히 살아가라는 말 뿐이었으니 나의 꿈은 허상이고 상상이었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순수작가가 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단호했다.


"화쟁이 돼서 굶어 죽을래?”


주저하는 것은 익숙했다. 무시당하는 것도, 내 의견이 사라지는 것도, 꿈이 허상이 되는 것도, 하지만 정말, 정말 내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도 괜찮은 걸까?


나는 많이 소심하고 조용한 아이로 자랐다.

지독히 가난한 집을 탈출하고 싶어서 결혼을 일찍 했다. 현실은 냉혹하고 잔인하리만큼 냉정했다.


처음에는 시어머니께 잘 보이고 싶었다. 칭찬을 바랐고, 사랑받고 싶었다.

명절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 음식을 차리고, 여행을 가더라도 혼자 묵묵히 뒷정리를 했다.

하지만 매번 시장에서 사 온 싱싱한 재료들은 괜히 싱싱하지 않거나 맛이 없다고 타박을 하고, 네가 얼마나 복이 많으면 저런 남편을 뒀냐며 약사나 공무원 며느리를 뒀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비교를 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는 것이 없다는 것을...


결혼생활 15년이 넘어갈 때쯤 부부사이에 갈등이 최고조였다. 남편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때 그때 데미안을 다시 꺼내 읽었다.

청소년 권장도서라지만 40대가 되어서야 나는 이 글의 맥락을 완전히 이해한 것이다.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 첫 문장이다. 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면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 소설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이야기이다.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 교리대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싱클레어는 밝은 길만 가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데미안을 만나면서 반기독교적인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에게 배웠던 가치관과 충돌을 한다. 어른들은 싱클레어에게 쓸데없는 소리라고 하지만 데미안은 기존의 가치관을 깨고 새로운 사고와 가치관을 모색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기 삶의 주인은 ‘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데미안의 유명한 문장이 있다.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어릴 때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아가다 보니 왜 이제야 이 문장이 가슴에 콕 들어올까?


헤르만 헤세가 이 글을 썼을 때 40대였다고 한다. 세상을 어느 정도 알만할 때쯤 독일의 청년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였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유럽인들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이고 최고의 사상자를 냈다.


불행의 역사에서 당시에 독일은 기독교적 사고관에 중점을 두었다.


전쟁은 누구를 위하여 하는 것이며

왜 인간들은 싸우는 것이며

기독교적으로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청년들은 극심한 허무주의와 우울감에 빠져있을 때 이 책이 나왔다고 한다.


물론 시대가 다르고 지금의 나는 전쟁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나 역시 자라면서 주변 사람들의 말에 많이 흔들리고 자꾸 무시받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싱클레어처럼 나는 밝은 길과 어둠 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왜 흔들리며 내면을 갉아먹었을까?


그동안 나는 항상 타인의 시선을 먼저 의식했다. 부모가, 남편이, 시댁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지만 정작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시댁에서 미움을 받았던 시기에 왜 나는 잘하려고 할 때마다 항상 구박을 받는지 의문스러웠다. 인정받기 위해 현숙한 아내, 효부로서 내 인생을 전부 결혼생활에 올인했다. 하지만 이 전쟁터에 나는 무기 없이 달려들었던 꼴이다. 사람은 변하지 않고 온전히 항상 일방적인 요구만 하는데 왜 인정을 그토록 받고 싶었을까? 인정욕구가 그렇게 사람 마음을 갉아먹는 것이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나는 밝은 길과 어두운 길 사이에서 흔들렸다.

밝은 길에는 부모님이 가리킨 대로 살아가는 나, 순응하는 나, 아무 문제없는 나.

어두운 길에는 화가를 꿈꾸던 나, 가난과 싸우던 나, 결혼 후에도 인정받지 못해 울던 나.

어느 쪽이 정답일까? 나는 늘 주저했고, 주저하는 동안 어느 길에도 발을 디디지 못했다.”



소설 데미안의 마지막에는 싱클레어가 거울을 바라볼 때 비친 모습이 데미안이다. 거울을 통한 데미안의 모습은 싱클레어가 진정한 자아로 각성을 한 순간이고 한 단계 성장을 했다는 점이다. 이제는 어느 길을 가더라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야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서 보이는 얼굴이 낯설다. 하지만 곧 알게 된다. 그 얼굴은 나였다.”

주체의 삶에서 남편도 시댁도 자녀도 나 자신보다 우선일 수 없다. 나를 온전히 돌봐야만 식구들과 다른 사람들을 건강하게 챙길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도 오랫동안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정말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1순위에 두었다. 그것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결국 더 건강하고 단단한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나는 우울한 가정환경과 결혼생활로 한쪽의 가치관에 심어져 살아온 탓에 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이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어떤 이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나는 나로서 살아가고자 마음을 먹은 뒤부터 나만의 가치관을 새롭게 재정립했고 또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나를 다듬어가고 있다. 그런 내가 어둠과 빛의 길을 가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이제야 시댁과 남편, 주변이 나에게 어떤 소리를 해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우선 예민하고 주변의식을 보며 눈치를 보던 나에게 네 마음이 괜찮은지 물어봐야 한다.

눈치를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이미 저 사람이 나에게 왜 저런 말로 상처를 줄까? 그사람의 입장에서 매번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굳이 내가 이해를 하려고 하지 않아도 무례인 것은 무례인 것이다.

무례함을 애써 이해하려는 노력은 필요없다는 것이다.


나를 우선 생각하자.


데미안을 통해 비로소 알의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제 나는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 더 이상 나는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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