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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유리 Jul 13. 2019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 들, 집안일.

소꿉놀이가 현실이 되기까지.

이혼을 하면서 우리를 힘들게 했던 것들을 떠올려봤다. 물론 모든 문제는 '우리'로부터 발생한 것이었겠지만, 외부적 요인이 비교적 높았다고 생각했던, 그러니 누군가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것들. 혹은 부디 사회가 빠르게 변화했으면 좋겠는 것들.


그 두 번째 <집안일> 이야기를 써본다.




소꿉놀이가 현실이 되기까지.

처음 신혼집에 들어가는 날,

우리는 침대도 없는 집에서 잠을 잤다.


여행도 자주 다녀봤었는데, 그러니 이렇게 한 집에서 놀고먹고 하는 일상은 종종 있었는데. 그럼에도 침대도 없는 방바닥에 누워 잘만큼 우리는 뭐가 그리 좋았을까. 그저 하나의 공간에 같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우리에게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도 좋았던 것 같다. 꿈을 꾸는 것 같았고 그래서였는지, 돌이켜보면 그땐 세상 모든것이 재미있었다.


이따금 냉장고를 가득 채워서 바라만 봐도 배가 부른 날이면 같이 집에서 놀다가 '우리 장 보러 갈래?'라고 하며 냉장고까지 손을 잡고 걸어갔다. (신혼집은 15평 남짓했다) 냉장고에서 주스 한잔 꺼내면서도 '손님 오늘 오렌지가 싱싱해요' 하고 놀며 따라 마셨다. 생각해보니 너무도 유치하지만 신혼은 원래 유치한 거니까!


일중독자였던 그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집으로 빨리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거였구나' 깨달았다며 행복감을 전했다. 그렇게 신혼의 우리는 퇴근을 같이 하고 '우리 집'이라는 공간에서 그저 노닥 거릴 수 있다는 행복을 만끽했다.


신혼은

'여보 오늘 일찍 오세요'

라고 말하며 넥타이를 매주는 척했던

소꿉놀이 같았다.


뭐가 먹고 싶은지 물으며 장난감에 모래를 가득 담아 먹여주는 척하고,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물으며 대화했던 그 어린 시절 놀이. (놀랍게도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교 시절의 놀이부터 가부장적 집안을 재현해왔다)


누구에게나 놀이는 지겨워질 수 있듯, 그 소꿉놀이는 우리에게도 조금씩 지겨워져 갔다. 그리고는 이내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아주 흔히 봐왔던 집안의 풍경>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집안의 남자들은 부엌에 들어가지도 않고 아빠도 오빠도 밥 한 그릇을 다 먹으면 엄마가 밥을 더 퍼다 줘야 하는 그 말 같지도 않은 현실. 우리의 결혼생활도 그 '소꿉놀이'에서 몇 년 후 이 '현실'로 들어가 버린 것.


너무도 익숙해서

맨 처음 물을 떠 오라는 그의 말에

나는 거절 의사를 표하지 못했다.


나는 왜 그 상황에 익숙해야 했을까. 그의 집(시댁)에 가도 그 풍경은 늘 같았다. 7살도 세대차이인지 그의 집은 훨씬 더 심했다. 그는 그렇게 내게 살면서 봐왔던 그대로 따듯한 식사를 요구했고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하고 서른 명의 직원들과 스타트업을 경영하는 나에게 아쉽지만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그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을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이혼을 하고,

그에게 긴 편지가 왔었는데

이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집을 나오고 몇 년 만에 먹어본 어머니의 아침밥을 먹으면서 어릴 때부터 나를 위해 밥을 챙겨 주던 어머니가 생각나 너무 행복하다고 느꼈고 바리바리 싸온 옷가지 중에서 그 많은 셔츠를 정성스레 다려주신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흔이 넘어서도 편의점 도시락, 3분 요리, 배달음식만 먹을 생각을 하니 내 삶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어.


그에게 필요한 건 아내가 아니라 엄마인 것 같았다.






나는 이혼을 하고
매일 밥을 잘 챙겨 먹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싫어한 건 요리도 설거지도 아니었다. 내게 필요했던 건 그저 잘 먹었다는 인사였고, 밥그릇을 치워주는 배려였다. 고기반찬을 모두 자신의 앞으로 배열해야 비로소 식사가 시작되는 고작 84년생 가부장적 남자에게 나는 식탐이 정말 없는 사람임에도 감당하기 어려운 서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을 떠 오라, 젓가락이 짝짝이다, 숟가락에 뭐가 묻어있다, 이건 찌개가 아니라 국이다, 말하는 그에게 훨씬 더 큰 상처를 받고 있었다.


나는 이혼을 하고 라면에 계란을 넣지 않고 청양고추를 넣을 때 행복했다. 나는 계란을 넣어 더 밍밍해진 라면보다 실컷 몸에 안 좋을 것 같은 맛의, 청양고추를 넣은 라면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막창을 넣은 오일 파스타를 만들 때에도 행복했다. 누구도 평가하거나 욕심내지 않을 음식을 내 마음대로, 마음 놓고 한다니. 마음이 너무 편해졌다. 자취 생활의 꿀 메뉴였던 참치 미역국을 보며 미역국에 참치를 넣는 사람이 어딨냐고 배를 잡고 웃던 그에게 막창이 들어간 오일 파스타는 내어놓을 수 없는 음식이었으니까.


그가 그렇게도 노래를 부르던 아침밥은, 내가 사업으로 인해 이렇게나 바쁜 인생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구했던 집안일은 그가 없어진 후로 훨씬 더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 친구와

아내의

차이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사랑은 식는다. 구혼은 전우애로 살아가는 현실을 부정한 적 없는 내게도 이 결혼생활이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자 친구'였던 나에게 하는 그의 행동은

누군가와 연애하면서 해왔던 것들이 베이스가 되고

혹은 친구들, 지인들의 연애 이야기들이 본보기가 되는데


'아내'가 되면서 나에게 하는 그의 행동은

'아내'로써 사는 모습을 가장 오랫동안 봐온 인생의 단 한 사람, 어머니가 본보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인 그에게도 남편인 시아버지께도 대단히 헌신적이었고 그렇지 못한 순간을 죄스러워 하셨다.


요즘에야 많은 남성들이 가사에 참여한다고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살아온 <엄마 세대>에서 집안일을 남녀가 1:1로 나눠하는 경우는 감히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신혼은 소꿉놀이를 하며 여자 친구였던 내가 아내로 가는 버퍼존이었다면, 이혼할 무렵의 우리는 소꿉놀이가 현실이 된 지 오래된, 그래서 그의 엄마를 기본적인 아내 모습의 디폴트 값으로 투영시키기에 충분한 익숙함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그냥 세상 빛나는 서른의 인생을 살겠다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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