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16.
아파트의 한 블록 옆,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돌로 포장된 거리는 국제적인 호텔 체인과 레스토랑, 카페가 늘어서 있는 관광객의 거리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가게는 두 군데다.
하나는 러시아의 카페 체인인 '더블비(Double B) 커피&티'로, 스타벅스를 찾을 수 없는 이 나라에서는 이를 대신할 외국 프랜차이즈다.
화사하고 깔끔한 외관에 은색으로 반짝이는 에스프레소 머신, 판매용 원두 팩이 진열되어 있는 찬장, 카운터 위의 영어 메뉴판, 투명한 뚜껑이 덮인 나무 쟁반 안에 놓여 있는 머핀과 파이 등은 익숙한 국제적 냄새가 나지만 어딘가 덜 프로페셔널한 인상 - 카페 입구 옆 옷걸이에 걸린 직원들의 겉옷과 말랑말랑한 모조 나무 바닥 등 - 은 또 묘하게 친근하다.
이 카페에서는 당연히 영어로 주문이 가능하다. 주문을 마치고 창가 자리에 앉아있자 곧 얼굴이 짙은색 수염으로 뒤덮인 남자가 아이스커피와 라즈베리 타르트를 가져다주며, 강한 억양의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Enjoy!"
나는 깜짝 놀라 올려다보았다. 그 목소리가 마치 러시아산 철강 파이프에서 나는 소리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거리와 버스에서 많이 본 조지아인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기가 막히게 씩 웃었다. 전혀 웃을 것 같지 않던 남자가 그렇게 부드럽고 환하게 미소를 짓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 비현실성은 조지아인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특성임을 차차 알게 되었다)
직원은 내게 커피를 가져다주고 나서 머신 뒤에서 카운터 여직원과 즐겁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카페 안에 울리는 굵직하고 명랑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안락한 휴식 시간을 보냈다.
...아, 이 라즈베리 타르트 정말 맛있네.
그 옆옆옆 건물에는 프랑스의 유명 베이커리인 '폴'이 있다. 폴은 아침 8시에 문을 열고, 검은색 의자와 흰 테이블이 있는 세련된 테라스를 갖추고 있으며, 오믈렛이나 크레페를 포함한 다양한 아침 메뉴를 제공한다. 트빌리시의 아침은 늦게 시작하고 조지아인들은 대부분 아침 식사를 거르기 때문에 테이블을 가득 채운 크루아상 바구니와 보석함처럼 빛나는 색색깔의 잼, 오늘의 날씨를 예견하듯 접시 위에서 노랗게 빛나는 계란 노른자, 나이프와 포크가 부딪히는 소리는 조용한 아침 거리에서 매우 호화스러운 인상을 풍긴다.
나는 이 두 가게를 무척 좋아했고, 마침 아파트와도 가까웠기 때문에 거의 매일 들러 커피를 시켜놓고 한동안 앉아있곤 했다.
이 두 가게에는 '조지아다움'이 전혀 없다. 이곳 특유의 환한 미소를 짓는 직원들을 제외하면. 의사소통은 영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로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분위기는 주변 거리와는 전혀 다르다. 가게에 들어서면, 언제나 소박하던 조지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현대적인 세련됨이 별안간 어지러울 정도로 덮쳐온다. 음식 맛과 인테리어와 그 모든 것이 이 나라 바깥의 것이다. 마치 낯선 땅의 외교 공관처럼.
(여기에 비하면 던킨 도넛은 어쩐지 토속적으로 느껴진다.)
어차피 여기는 조지아고 나에게 있어서는 프랑스나 러시아나 마찬가지로 머나먼 외국인데 이곳에서 '익숙함'을 느낀다는 사실은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두 가게를 여행 중에 잠시 쉬어가는 느낌 - 낯선 골목을 헤매다 발견한 익숙하고 편한 분위기에 이끌려 찾았다.
이방인이 거주민과 가장 다른 행동을 보이는 것은 식당에서가 아닐까. 처음 가보는 나라의 식당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방식을 힐끔거리느라 바쁘다. 이 메뉴의 재료가 대체 무엇인지 고민하고, 기껏 주문해놓고도 접시가 나오기 전까지 혹시나 주문이 잘못 들어가진 않았을지, 결제를 테이블에서 해야 하는지, 팁은 안 주는 것이 맞는지, 내가 내민 신용카드가 제대로 결제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의문과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자연히 행동이 소심해지고 초조해진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 10 여끼 정도가 지날 때까지, 이 이방인 티는 좀처럼 벗을 수 없다.
그러나 더블비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멍때리거나 폴의 테라스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대고 크레페를 이리저리 조각내고 있을 때 나의 경계심은 노곤노곤하게 풀어진다.
이 두 가게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공관이지만, 서로 구분이 가능할 정도의 지역적 특색 약간을 제외하고는 공동의 국제적인 코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곳의 음식, 시스템, 에티켓, 언어 심지어 인테리어와 특유의 분위기는 너무나 익숙했다. 내가, 혹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것, 현대 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외국 문물을 접하며 사는 국제화된 인간으로서 잘 아는 것들.
나는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주문하는 것에서부터 음식을 먹고 결제하는 과정에서 어떤 불편함이나 조바심도 느끼지 않았다. 사실상 여행 중이라면 마땅히 느껴야 하는 수준의 낯섦조차도.
내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폴의 크레페를 다 먹고 핫초콜릿을 홀짝이면서였다. 녹진한 초콜릿은 약간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며 목을 넘어갔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부족한 것도 없고 별 커다란 사건사고도 없이 무탈하게 살아온 내가 가장 익숙함을 느끼는 것은 이, 반들반들한 나무 테이블과 알파벳으로 쓰인 음식 이름들, 무리 지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주입당하는 관광의 느낌인 것이다.
나는 백반집보다 스타벅스가 편하다. 그렇게 '국제적'이고 별 볼 일 없는 세대다.
나는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이 곳에 앉아있는 이 많은 사람들도 이 익숙함에 끌리는 걸까. ....프랑스인이라면 고향의 맛을 찾아온 것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