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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Apr 16. 2020

여행길 -초반-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17.


디두베 버스 정류장은 디두베 역에서 내려 좁은 통로를 지나면 있는 시장 너머에 있다. 처음 오는 여행자라면 지하철역에서 나오자마자 토마토, 사과, 포도가 가득 쌓인 상자들, 다닥다닥 붙어있는 빵과 신발과 휴대폰 가게, 파라솔 아래에서 꽃을 다듬는 노파, 왁자지껄한 대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질지도 모른다.



이곳은 트빌리시에서 시외로 나가는 '마르쉬루트카', 하얀색 20인승 미니 버스들의 집결지이다. 대표적인 행선지는 스테판츠민다. 카즈베기라고도 불리는, 조지아의 그 유명한 산악 마을로 가려면 여기서 출발한다.


스테판츠민다는 트빌리시에서 편도 3시간 정도 걸린다. 마르쉬루트카는 이 길을 10라리라는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이다. 한 시간에 한번 꼴로 운행하는데, 스테판츠민다는 인기 있는 행선지이기 때문에 조금 일찍 도착하지 않으면 타지 못하는 일도 많다고 한다.


디두베 역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으러 두리번거리고 있으면 웬 사람들이 갑자기 말을 걸며 다가온다. 이들은 사설 택시인 미니밴 운전수들이다. 미니밴은 운전수들이 직접 모객을 해서 승객이 대여섯 명 모이면 목적지까지 운행한다. 말하자면 셰어 택시라고 할 수 있다.

마르쉬루트카 출발 시간을 놓쳤거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못 타고 남겨진 경우 외에도 미니밴은 미니밴 나름의 장점이 있다. 승객이 적은 만큼 훨씬 쾌적하게 갈 수 있고, 가는 길에 관광 포인트 몇 군데에서 잠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내려주는 특전이 있다. 마르쉬루트카에 비하면 요금이 비싸지만 그래도 20-30라리면 여전히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다.


나는 셰어 택시가 나쁘지 않은 선택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호객꾼이 달려드면 일단 겁을 먹는 성격 때문에 운전수들을 뿌리치고 마르쉬루트카를 타러 가려고 했다. 그때 수완이 좋아 보이는 젊은 남자가 유창한 영어로 20라리를 부르며 나를 잡았다. 본의 아니게 내 행동이 한번 튕기는 것으로 보였는지 아까 다른 기사가 말한 25라리에서 5라리를 깎은 가격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아나누리 요새를 들렀다 간다는 말에 솔깃한 나는 그대로 그를 따라갔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겐 25라리를 받으니 이 특별가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고, 나는 조용히 빵을 사서 독일에서 온 여자 둘 - 50라리 - 과 그의 미니밴에 앉아 잠시 기다렸다. 20분 정도 지나 승객 2명이 추가되었고 기사는 출발을 알렸다.



오전 10시, 미니밴은 "카즈베기!" "고리!" "바투미!"를 우렁차게 외쳐대는 아저씨들, 마르쉬루트카와 승용차로 비좁은 사잇길, 주차장에서 팔짱을 끼고 어슬렁거리는 남자들과 매캐한 매연 냄새, 비닐봉지를 든 할머니들을 지나 덜컹거리면서 버스 정류장을 빠져나왔다.




나는 미니밴의 조수석에 앉았는데, 닛산 직수입 차량이라 이번에도 조수석이 왼쪽이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것도 잠시 기사는 음악을 틀었다. 그의 음악 취향은 약간 비트가 있는 테크노 댄스 계열로 솔직히 중장거리 여행 내내 듣기에 썩 좋은 음악은 아니었지만, 운전하는 사람은 그였고 뒤에 탄 일행 중에서도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어폰을 꽂고 내 음악을 따로 들을 수도 있었지만 그냥 그 무덤덤한 비트에 적응하는 쪽을 택했다.


조수석에 앉아 좋은 점은 좀 더 널찍한 공간과 자유로운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외에도 운전수의 이런저런 흥미로운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빌리시를 거의 벗어났을 무렵 나는 그가 갑자기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한 손으로 연달아 성호를 긋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그가 또 한 번 같은 행동을 했을 때, 나는 우리가 지금 수도원 옆을 지나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사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앞유리창의 왼쪽을 내다보았는데, 그 방향에 조지아 정교회 특유의 네모난 상아색 건물 그림자가 휙 지나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오른편에 므츠헤타의 즈바리 수도원이라고 쓰여있는 표지판이 있었다.

그는 그 후로도 십자가가 보일 때마다 세 번씩 성호를 그었다. 전방에 십자가가 있다는 표지만으로도 그 독실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충분했다. 그는 한 번도 건너뛰는 법 없이 그 후로 서른 번은 넘게 성호를 그었다.


어쩌면 조지아의 도로에는 더 많은 가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가 보았을 때 조지아의 운전수들은 호시탐탐 중앙선을 넘어 앞차를 추월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듯했다. 사실 조지아의 도로에는 중앙선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가드레일로 막아놓지 않은 대다수의 도로에는 오렌지색이 없다.

앞차가 좀 느릿하다 싶으면 운전수들은 몸을 앞으로 숙이고 고개를 빼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냅다 액셀을 밟고 옆 차선으로 빠졌다가 앞차의 앞으로 자신을 쓱 밀어 넣었다. 만약 옆 차선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대놓고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 한편으로 이유 없이 속도를 늦추는 것도 이들의 특징이었다. 갑자기 달리기가 지루해지기라도 한 듯 힘을 쭉 빼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길가에 아슬아슬하게 나와 있는 동물-소 혹은 사람-을 보고 빵빵대고, 짙은 배기가스를 뿜어내는 트럭이 앞을 가로막으면 다시 맹렬하게 경쟁의식을 불태웠다.



다소 심심한 교외 도로 풍경이 눈에 띄게 변하기 시작하는 것은 아나누리 근처부터다. 정확히 말해 그 전의 진발리에 큰 저수지가 있어, 도로 오른편에 불투명한 옥색 물이 나타난다. 저수지의 동쪽 끝에 위치한 아나누리 요새는 견고한 중세식 성벽과 다각뿔 지붕을 지닌 교회탑으로 구성된 관광 포인트다. 주차장에는 많은 버스와 미니밴과 승용차들이 서 있고, 색색깔의 관광객들이 줄지어 요새 입구로 들어간다.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운전수는 10분밖에 주지 않았다. 나는 다리 위에서 아나누리 요새를 찍고, 탑 앞에서 퍼자는 두 마리의 개를 쓰다듬어준 다음 다시 미니밴에 올라탔다.


다른 일행들도 10분이 되지 않아 모두 자리에 앉았다. 무심한 여행객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나누리는 트빌리시에서 겨우 70 여 km 떨어져 있을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는 길이 멀다는 생각을 했고, 아직 그 험준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코카서스 산자락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조금 조바심을 냈을 뿐이다.



아나누리를 지나고 나서부터 계속 희푸른 강이 자갈밭 위에서 좁고 얕게 구불구불 흐른다. 그 옆에 있는 캠핑장과 바베큐장은 형편없이 방치되어 있다. 운전수는 이 강을 오른쪽에 두고, 산뿌리를 굽이치는 길을 시속 100km를 유지하며 달린다. 바람 소리에 테크노 비트가 뒤섞이고 무수한 오렌지색과 파란색 파라솔의 폐허들이 어지럽게 지나갔다.


위태롭게 길가를 걷는 사람들, 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석류들, 나무 타는 냄새, 길쭉한 빵을 그려놓은 간판, 뜬금없는 곳에 멍하니 서 있는 개들이 있는 작은 마을을 우리는 쏜살같이 지났다.


북쪽으로 갈수록 구름이 점점 짙고 푸르게 깔리고, 가끔 구름의 틈새로 햇빛을 받은 산의 뺨이 아름답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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