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더 Apr 29. 2020

카즈벡의 세 가지 인상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19.


첫인상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부터 이틀 간은 흐린 날씨였다. 마을 가까이에 있는 게르니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는 보였지만 교회 뒤쪽의 산등성이 서너 개를 빼고는 온통 새하얬다.



산의 경계선을 깔끔하게 볼 수 없는 것은 아쉬웠으나 커다란 구름 덩어리들이 쉴 새 없이 모습과 색을 바꿔가면서 흘러가는 광경은 제법 장관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선 흔히 그렇듯, 누르죽죽하고 어두운 빛깔들의 산들은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저 산, 게르니티 교회의 뒤쪽에 흐릿하게 보이는 갈색 산, 저게 카즈벡인가?

나는 호텔 창가의 의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로 여독을 풀며 눈앞에 펼쳐진 갈색 멜로디를 감상했다.



그것과 눈이 마주친 것은 오후 5시쯤 샤워를 하고 노곤노곤한 기분으로 잠시 밖으로 산책을 나왔을 때였다. 날이 맑아졌다곤 할 수 없지만, 하늘의 몇몇 군데는 찢어진 청바지 틈새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로 보았다.

교회의 산등성이 뒤에, 그 뒤에, 그 뒤의 뒤에 희고 푸른 산이 있음을.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공백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 큰, 너무나도 큰 산의 인상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 내 인식 너머에 있는 엄청나게 거대하고 사나운 것을 나는 보지 못하고, 그것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 오싹했다.

내가 눈을 깜빡인 다음 순간 우윳빛 안개가 다시 그의 눈을 덮었다.



다음날 아침, 코카서스 대산맥에는 아침 빗방울을 흩뿌리는 안개가 그득하게 흘러넘쳤다. 어제 슬쩍 본 그 인상이 없었더라면 나는 오늘도 저 뒤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게르니티 교회까지 올라갔을 때도 교회의 서쪽 뒤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하얬다.


하얀색이 무(無)라는 착각, 인류의 사상사에서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두려운 것을 감춘 안개를 앞에 두고 호텔 로비의 사람들은 더없이 평온해 보인다. 삼삼오오 모여서 수제 버거나 치즈케이크를 먹고 있고, 원색의 바람막이를 입은 영국인 단체 관광객이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가 일종의 동물원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무지한 관광객들을 자연에서 떼어놓는 얇은 유리창. 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에버랜드가 아니라 쥬라기 공원쯤이지만.




두 번째 인상


둘째 날 저녁에는 방 안에 있는 내내 양옆과 윗방의 소음으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쿵쿵대는 발소리,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는 소리, 복도에서 웅얼대고 깔깔대는 대화에 심지어 옆방에서 콘센트를 툭하고 힘주어 뽑는 소리까지 신경을 파고들었다. 그렇다. 내 병적으로 예민한 청각과 이로 인한 불면증은 서울만의 잘못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 이른 시간에 짜증스럽게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창 너머로 갑자기 희뿌연 얼굴이 떠올라 심장이 파드득 놀라 일어났다.

 


국경 마을의 밤은 입체감이 없는 검은 평면이었다. 아래쪽에는 인간들이 켜놓은 전깃불들은 삐뚤어진 8자를 그리고 있었다. 이쪽 편의 스테판츠민다, 그리고 저쪽 편의 게르니티 마을. 찻길을 비추는 가로등을 제외하면 불빛은 그리 많지 않았고, 집들은 너무나 아득하게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눈높이와 수평인 지점에서 빛나는 단 하나뿐인 작은 불빛을 알아보았다. 마치 어둠을 가르는 등대처럼. 게르니티 교회다.


그리고 그 옆에 - 아니, 위에. 그보다 말도 안 되게 위에.

이틀 내내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설산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숨이 막혔다. 아니, 어떻게 저곳에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지? 저렇게 멀고, 멀고, 높은, 너무 높은 곳에.


나는 산의 실제적인 크기보다도, '커다랗다'는 사실 그 자체에 짓눌렸다. 사방에서 중력이 나를 찌그러뜨리려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자, 보아라. 여기에서 네가 얼마나 작은지.

나는 산과 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산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보려고 했지만 대충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현대인의 이기를 사용해 정답을 찾아보았지만 실제로 카즈벡 산이 5,054m고 조지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며, 스테판츠민다와의 직선거리는 약 12km라는 사실은 내가 느낀 인상을 전혀 설명할 수 없었다. 나의 시야를, 정신을 온통 사로잡는 이 거대함.

그 존재감에서 눈을 뗀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산을 보지 않으려면 고개나 몸을 통째로 돌려야 했다. 그러고도 한동안 여운처럼 남는 가벼운 전율.


게다가 하얗다. 새까만 밤에 더욱 새까만 산들, 그리고 유령처럼 하얀 산.




세 번째


그다음 날 나는 터무니없이 이른 시각, 그러니까 아침 5시 반에 눈을 떴다. 알람을 맞춰놓은 것도 아니었다. 시차에도 이미 적응한 참이었고 원래라면 내가 결코 깨지 않을 시각이었다. 그러나 눈꺼풀을 열기 전부터 무엇이 나를 깨우는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막 해가 뜨고 있었다.



창문 너머 간밤에 보았던 유령 같은 흰 그림자는 이젠 거의 뻔뻔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게 앞에 나와 있었다. 지난 이틀 간의 두꺼운 구름은 차가운 아침 공기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오랜만에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해는 산의 머리를 빗어내렸다. 햇빛을 받은 만년설은 눈이 부실만큼 환하게 빛났고, 어두운 자주색과 갈색 바위는 은은한 연보랏빛과 금색을 띄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카즈벡 산이 보이지 않을 때와 보일 때의 공기마저 달랐다. 폐부를 찌르는 듯 날카로운 냉기. 단번에 졸음이 가신 나는 드디어 그 모습을 샅샅이 살펴볼 수 있었다.


둥글게 솟아오른 매끄럽고 하얀 정상, 그 아래 짙은색의 커다란 갈고리처럼 튀어나온 부분이나, 슈가파우더가 쓸린 듯한 흰 자국이 나있는 비스듬한 경사면, 오른편에 작은 가시가 있는 등지느러미처럼 돋아난 등성이....

카즈벡은 녹갈색을 띤 앞쪽의 산들과는 전혀 다르고 검은 물고기 떼 사이의 흰 고래 같았다. 너무 눈에 띄어서 어떻게 안개와 구름이 지난 이틀간 그를 그렇게 꽁꽁 숨길 수 있었는지 새삼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 옆에 있는 지마라산 역시 하얗지만 그는 윗부분이 잘려나간 것처럼 네모난 모양이었고 경사면이 부드럽고 소복하게 눈으로 쌓여 있어 훨씬 조용하고 얌전한 느낌을 준다. (그래도 4,779m짜리지만)

이에 반해 카즈벡은 팔짱을 끼고 있거나 양손을 허리에 대고 서 있는 사람의 동작을 연상시킨다. 아주 당연하게 시선과 주목을 받는데 익숙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무심하다.



밝고 새파란 하늘 아래에서 보는 -그리 많이 아래는 아니지만- 그는 그저께나 어젯밤처럼 무섭진 않았다. 어쨌든 이젠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대단한 크기와 타고난 위압감은 여전하다. 게다가 지금은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이곳저곳의 상처들이 뚜렷하게 드러나, 훤히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도 오히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약간 긴장감이 들게 한다. 오싹오싹하면서도 눈을 떼기가 어려운 마력이 있다. 나는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 한동안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신비함은 아주 단순하고, 대낮의 밝은 햇빛 아래서도 여전히 휘황찬란한 법이다. 브라운 신부님이 그렇게 말했던가.

카즈벡은 그렇게 신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전 18화 여행길 -후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