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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May 11. 2020

카즈벡과 카즈베기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20.


카즈벡은 산이고 카즈베기는 마을 이름이다.

....마는, 사실 그렇지도 않다.


조지아의 많은 이름들은 온전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조지아'라는 것도 좀 더 국제적인 어감으로 대외적으로 통하는 국명이고, 아직 많은 외국인들은 소련 시절의 '그루지야'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들 스스로가 자국을 부르는 이름은 '사카르트벨로(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다.


국명을 제외하고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 이 카즈벡과 카즈베기일 것이다.



일단 저 유명한 산, 조지아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자 대 코카서스 산맥에서 일곱째 가는 산, 정상에 뭉툭한 갈고리 모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산의 이름은 조지아어로 므킨바르트스베리(მყინვარწვერი)다. 무시무시하게 길고 어려운 이 이름의 뜻은 '빙하 정상', '추운 산'이다. 실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러나 어려운 발음 탓인지 대체로 그냥 카즈벡 산 혹은 카즈베기라고 불린다.


문제는 이 산이 위치한 곳의 지방자치제 이름도 공식적으로 카즈베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카즈백 산의 전경으로 유명한, 실질적으로 '카즈베기'라고 불리는 마을의 이름은 카즈베기가 아니다. 이 마을의 공식 명칭은 '스테판츠민다'다.


즉, 정리하자면 '카즈베기'라고 불리는 세 곳의 공식 명칭은 다음과 같다.

그 산: 므킨바르트스베리 혹은 카즈벡

그 마을: 스테판츠민다

그 지역: 카즈베기


좀 더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설악산이 설악군에 있는데 사실 정확한 산 이름은 '설악'보다는 '설익'이고 그 산 아래에 있는 '설악'이라는 마을 이름은 정식명이 아닌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설악 가는 버스'를 타면 대충 그 근처에는 도착하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참고로 정류장에 이렇게 목적지가 영어로 쓰여 있는 경우는 스테판츠민다 외에 거의 전무하다


저 5,054m의 카즈벡 산을 직접 등반하거나 조그만 카즈베기 지자체를 지칭해야 하는 공무원보다는 관광지인 스테판츠민다에 가는 관광객 수가 훨씬 많으니, 손님들을 맞아야 하는 마을이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하고 간단한 이름인 '카즈베기'를 가져간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버스 정류장에도 스테판츠민다라고 쓰여있는 아래에 꼭꼭 카즈베기라고 같이 써놓고, 내가 본 모든 쉐어 택시 호객꾼들은 예외없이 "카즈베기"라고 말했다. 스테판츠민다라는 마을 이름이 그들에게도 좀 번거로울 수도 있고, 아니면 관광객들이 공식 명칭보다 비공식 명칭에 익숙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일지도 모른다.


조지아 정교회의 수도사 성 스테판의 이름을 딴 스테판츠민다는 19세기 초 러시아의 침략에 저항했지만, 마을의 영주가 주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그 공로로 러시아 군에서 승진했다. 그 후 그는 '카즈베기'라는 성을 하사 받아 가브리엘 초피카시빌리-카즈베기가 되었다. 1925년 소련 하에서 카즈베기라는 지명이 공식적으로 승인된 전후로 오랫동안 마을은 카즈베기라고 불렸다. 본래 이름이자 조지아의 자존심인 스테판츠민다라는 이름을 되찾은 건 2006년의 일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을 경성으로 부르는 것과 비슷한 셈인데, 이 사정을 알고나니 카즈베기라고 부를 마음이 뚝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여행자들과 그들을 상대하는 현지인들은 그냥 카즈베기라고 부른다.


내가 잘못 읽지 않았다면 조지아어로는 SALARO라고 읽는다

 

조지아의 이름은 늘 이런 식인 것 같다. 여러 개의 다른 언어들이 서로를 덮어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그 수정 이력을 들춰보면 편찬자의 국적도 각양각색이다. 조지아는 기원전부터 페르시아와 몽골, 오스만투르크, 러시아, 독일 등에게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점령당했다.


조지아어는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독자적인 언어 체계 중에 하나인데, 그 어원은 너무 복잡하고 다양해서 4개의 아시아와 4개의 유럽 국가가 만나 열여섯 개의 팔로 서로 악수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연상시킨다. 게다가 조지아어 자체도 매우 어렵고 세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쉬운 영어나 러시아어의 기준에 맞춰 대충 그런 식으로 부르는 일이 많다.

 


가끔 조지아 사람들이 스스로 '조지아'나 '카즈베기'를 말할 때 느껴지는 기묘한 무심함은 그 이름이 사실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표층적인 이름에 전혀 상관없이 여전히 굳건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위는 러시아, 아래는 터키, 역사상 가장 크고 강력했던 나라들 사이에 끼어서 단 한 세기도 전쟁 없이 보내지 않았음에도 이 나라는 고유의 언어와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몇 개의 언어가 서로 다투든, 몇 겹의 역사적 사건이 층층이 삐뚜름하게 쌓여 본래의 반듯한 경계를 흐릿하게 가리든 그 산은 그 산이요, 그 마을은 그 마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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