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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Jun 15. 2020

카즈베기의 게르니티 교회 트레킹에 대한 안내서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 21.

정면에 있는 산 위에 조그맣게 튀어나온 두 개의 점이 바로 게르니티 교회다.

스테판츠민다는 납작한 마을이기 때문에 거의 어디서든 고개를 약간 들면 500미터쯤 위로 솟은 작은 산과 그 위에 작은 왕관처럼 올려진 게르니티 삼위일체 교회를 볼 수 있다. 사실상 스테판츠민다의 관광지로서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므로, 이 작고 외진 마을까지 와서 저기에 올라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스테판츠민다의 여행자는 둘로 나뉜다. 걸어가는 사람과 걸어가지 않는 사람.


차를 타면 10분밖에 걸리지 않고, 광장에는 많은 차와 기사들이 육지의 갈매기처럼 배회하고 있으며, 솔직히 나는 차를 타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 따위 알 바가 아니므로 차로 올라가는 방법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마을에서 가까워 보이는 게르니티 교회지만 저기까지 걸어가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과 정성 - 그러니까 일종의 성의가 필요하다. 편한 옷차림과 운동화는 필수다. 트레킹 코스의 난도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길이 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사도 좀 있고, 험준한 산들이 얼어붙은 높은 파도처럼 사방에서 달려들 듯 서 있는 탓인지 실제보다 더 고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햇빛을 가려주는 나무는 단 한 그루도 없다. 자외선 차단제 추가. 그리고 코카서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거칠고, 스테판츠민다 자체가 고지대라 한 시간만 걸어 올라가도 해발 고도는 이미 2천 미터를 넘긴다. 계절을 불문하고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바람막이를 챙기는 것이 좋다.



물과 먹을 것도 준비해 가자. 트레킹을 시작해서 돌아올 때까지 매점 같은 건 없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빵이나 과일, 초콜릿을 챙겨가면 도움이 된다. 들고 다니면서 먹을 수 있는 것이 좋다. 도시락을 까먹을 만큼 한가한 구간은 없고 산 위는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자리를 깔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게르니티 마을로 들어가기 전 길가의 과일 가게에 잠시 멈춰 섰다. 모든 것이 빛바랜 누런빛, 짙은 갈색, 차가운 회색을 띠고 있는 이 외진 국경 마을에서 과일 가판대는 눈부셨다. 상자에 흘러 넘칠 듯 가득 담긴 이 많은 사과, 배, 귤, 감, 모과, 포도, 포도, 포도들은 모두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내가 여섯 가지가 넘는 포도들 사이에서 망설이자 가게 주인 할아버지는 서로 다른 종류의 포도알을 한 움큼씩 쥐어주었다. 모든 포도는 색깔만큼이나 새콤함과 달콤함이 각기 다른 비율을 이루고 있었다.


주인 할아버지의 친절에 가방이 무거워졌지만, 올라가면서 하나씩 입에 넣다 보니 걸음도, 바람도, 산도 조금씩 즐거워졌다.


게르니티 교회에서 본 광경. 앞쪽이 게르니티 마을이고, 뒤쪽이 스테판츠민다. 마을 끝에 있는 숲 바로 앞, 검은색 직사각형 건물이 바로 룸스 호텔이다.


출발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사실 게르니티 교회가 있는 산은 스테판츠민다가 아니라, 스테판츠민다와 가느다란 도로 한 줄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있는 또 다른 마을인 게르니티에 속한다. 애초에 '게르니티' 교회니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산들로 둘러싸인 조그만 작은 분지에 짓다만 건물들과 편평한 지붕들의 군락이 갈겨쓴 8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스테판츠민다, 다른 하나는 게르니티다.



이건 행정 구역 분류의 문제이지 실제 트레킹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책이나 웹정보에서 안내하는 '트레킹 코스’는 게르니티에서 시작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테판츠민다에 숙박하기 때문에 그 이동 시간이 추가된다. 특히 스테판츠민다의 동쪽 끄트머리, 꼭 집어 말해 룸스 호텔에서 출발하면 그 외로운 경사로를 쭉 걸어 내려와 평탄한 중심가를 가로지르고 얕은 개천을 건너 -여기서부터 게르니티다- 소방서와 와인병으로 벽을 장식한 식당들, 카페, 게스트 하우스들을 지나 낡은 탑이 올려다보이는 트레킹 코스의 입구에 도착하기까지 벌써 30분이 걸린다. 그러니 스테판츠민다에서 묵는다면 트레킹 시간을 여유롭게 잡아두는 것이 좋다.



스테판츠민다에서 오는 도중에 깨달았겠지만 게르니티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묵었다면 엄청나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만약 트레킹이 주목적이라면 게르니티 쪽에 숙소를 잡는 것이 편하다.


(스테판츠민다를 편들자면, 명소로의 접근성은 게르니티가 뛰어나지만 여기에서는 카즈벡 산이 앞산에 가려 보이지 않으므로 아름다운 전망이라는 측면에서는 스테판츠민다의 압승이다. 또 식당과 슈퍼 등 대부분의 편의시설이 스테판츠민다의 중심가 주변에 있다.)


어쨌든, 스테판츠민다에서 다리를 건너왔든 게르니티의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느긋하게 걸어나왔든 간에 이제 트레킹을 시작하자.


소박한 카페 너머로 인적이 뚝 끊기고 무너진 탑이 보이면 이제부터 산길이다.


육안으로도 교회가 어느 쪽인지 보이고, 게르니티에서 교회가 그려진 표지판을 따라가는 길은 하나이기 때문에 트레킹 코스의 입구까지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여기에서 길은 하나로 보이겠지만 실은 두 개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오른쪽에 있는 탑으로 올라가는 회색 길을 선택한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사실 이쪽이 '공식적인’ 트레킹 루트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오른쪽 길은 시작부터 가파르게 올라가는 반면, 왼쪽 길은 경사가 거의 없이 태평하게 산 밑동을 따라 돌아간다. 왼쪽 편에는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다. 손을 담가보면 아주 차갑다.



사람이 주변 환경에 쓸 수 있는 ‘주의’란 것에 총량이 있으니, 항상 발 밑을 살필 만큼 남겨두느라 애를 써야한다. 이 길은 주의를 빼앗는 것들로 가득하니까.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파랗고, 등 뒤에 있는 그 아래 짙은 잿빛과 탁한 갈색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바위산은 초현실적인 벽지 같다. 옆에서는 작은 개울이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발 밑에는 말라붙은 태양처럼 생긴 꽃이 머리만 남아 떨어져 있다. 머리는 갈색이고 꼬리는 연두색인 조그만 도마뱀이 그 작은 발로 몸을 밀면서 풀숲으로 들어가면, 그에 항의하듯 풀벌레 소리가 커진다. 쓰쓰쓰쓰 스스스 푸르르틋 트틋 하고 울리는 벌레 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와 귀를 찌른다.


이 자연의 소음에 고작 한 명의 발소리는 흔적도 없이 파묻히기 일쑤다. 가끔 내가 정말 현실을 걷고 있을까, 여기에 과연 인간이 나 말고도 존재하는가 확인하고 싶을 때 옆을 올려다보면 된다. 50m쯤 위에 있는 비탈에서 예의 그 오른쪽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밝은색 머리를 볼 수 있다. 더 위로는 게르니티 교회의 뾰족한 지붕이 보인다. 오른쪽 길은 좁고 거칠기 때문에 로프나 바위에 손을 짚고 길을 올라가는 트레커들은 약간 지친 듯 보인다. 그에 비하면 왼쪽 길은 산책로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이 덜 밟은 길을 걷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고뇌는 갈림길이 아니라 중간에서 찾아온다. 이 길이 맞는지, 되돌아가야 하는 게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말이다.


왼쪽 길은 오른쪽 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고 또 좀처럼 경사가 높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교회를 지나다 못해 교회가 등 뒤로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미적거리며 가던 대로 나아가고 있으니 슬슬 이쯤이면 이 길은 어디로 가는지 의문스러워질 만도 하다. 이러다 카즈벡 산의 입구에 도착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내가 지금 저 무시무시한 산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과장스러운 걱정까지 든다.


얄팍한 위안과 연약한 확신을 얻고자 해도 주변에 물어볼 사람은커녕 표지판이나 화살표도 없다. (의외로) 인터넷은 잘 터지지만, 구글 지도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두 길 다 나오지 않으니까.


불안과 두려움, 모험심, 해방감은 고스란히 혼자 걷는 이의 가방에 들어있다.



그러나 계속 걸어가라.

잘못 왔음을 알게 되는 것은 결국 끝에 가서일뿐, 도중에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잘못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찻길이나 다른 트레킹 루트와는 달리 교회의 남쪽에서 올라온다. 조금 돌아가는 길이지만 내내 평탄하다는 게 장점이다.



게르니티 트레킹은 시작만큼이나 끝도 모호하다. 그저 어떤 순간 눈 앞에 바람이 세게 부는 넓은 풀밭이 펼쳐져 있고, 내가 완만한 경사면이 서로 겹쳐진 들판 한가운데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 여정은 끝이 난다.



쉴새 없이 부는 바람 때문에 짧은 잔디는 거의 드러누워서 옆으로 자란다. 모든 것이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



도중에 본 트레커는 대여섯 명뿐인데 게르니티 교회는 아주 작고 사람들로 북적인다. 의아함도 잠시, 가득 차 있는 주차장이 인구밀도를 해명한다.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담 안에 서 있는 교회는 어떻게 대체 그 오랜 시간 동안 바람과 눈, 자연에 무너지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로 소박하다. 앞으로는 무시무시하게 흰 카즈벡, 뒤로는 오래된 녹슨 철벽 같은 샤니 산, 발 밑은 작은 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아찔한 벼랑. 교회는 이 어떤 환경에도 대적하려 드는 공격성 없이, 하늘에서 통째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만히 서 있다. 그 특유의 초연함 덕분에 색색깔의 바람막이를 입고 분주하게 입구로 들어가는 관광객들이 오히려 조용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이 건물을 귀찮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갔을 때 교회 내부는 공사중이었기 때문에 입구에서 짧은 묵념을 마친 사람들은 교회 뒤편 절벽에 몰려있었다. 어디선가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내는 드론이 날아다니고, 모두들 번갈아가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개들은 바닥에 배를 깔고 무심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챙겨 계단을 내려가는 관광객들을 지켜보았다.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오는 것은 실제보다도 짧게 느껴진다.




트레킹 코스에 대해 좀 더 실용적인 이야기 몇 가지.



앞서 이야기한 두 갈래의 트레킹 길 외에 차도로도 올라갈 수도 있다. 이론적으로는.

차도를 걸어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지만, 게르니티 뒤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독특한 각도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위)사람이 없는 왼쪽 길 (아래) 오른쪽 길의 구간 일부.

'가지 않은 길'에서 느낄 수 있는 천연의 고독과 약간의 공포 없이 마음 편하게 가고 싶다면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오른쪽 길로 가는 것이 좋다. 이쪽 길에는 항상 두세 명 정도 사람이 있다. 다만 경사가 매우 가파르고, 가끔 손으로 바위를 짚어가며 올라가야 하는 구간이 있다. 비싼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있다면 약간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의 경사다.


한편 왼쪽 길은 조금 돌아가기는 하지만 경사로가 완만하고, 왼쪽에 계속 개울이 흐르고 있으며 매우 조용하다는 장점이 있다.


내가 이 길을 알게 된 것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왼쪽 길로 가라고 말한 것처럼 내게 왼쪽 길로 가라고 말해준 사람은 여행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어느 호주인 블로거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말을 해준 것은 게르니티의 카페에서 만난 트레커라고 한다. 이렇게 좋은 비밀이 세상에 퍼져나가는 거지.


wander-lush> https://wander-lush.org/kazbegi-to-gergeti-trinity-church-hike-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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