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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Aug 25. 2020

룸스 호텔의 미덕과 악덕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23.

https://roomshotels.com/kazbegi/

산간벽지에 위치한 이 아름다운 호텔은 단연 조지아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이다. (물론 가장 비싼 숙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세련미 넘치고 기품있는 디자인, 국제적인 매너를 갖춘 스탭들, 호화로운 아침 식사는 이 호텔의 훌륭한 점들이지만 왕관을 장식하는 가장 값진 보석은 따로 있다.



바로 전망이다. 

룸즈 호텔은 스테판츠민다의 동쪽 끝 산비탈에 위치해 있어 게르니티 교회와 카즈벡 산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넓은 테라스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아침을 먹으면서 혹은 연푸른색 수영장에 몸을 담그고 저 신화 속의 산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황홀한 경험으로 소문이 나서, 온갖 나라의 많은 관광객들을 이 외진 곳까지 끌어들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이끌려온 여행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스테판츠민다의 광장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차분한 갈색과 회색을 띠는 이 작은 마을 어디에도 그렇게 큰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호텔이 있을 만한 방향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구글 지도만을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포도 위로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것은 그나마 견딜만 했지만, 지도에서 내가 오른쪽으로 꺾어야 할 지점에 이르자 나는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그 좁은 길은 낡은 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는 황량한 산비탈로 통하는 모양새였던 데다 경사가 족히 15도는 되어 보였던 것이다.


정말로 경사가 이렇다!

그러나 내가 느릿느릿 걷는 사이에 미니밴 몇 대와 커다란 관광 버스들이 그 길로 걲어 사라졌으므로 저 위에 뭐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중력의 영향으로 초마다 무게를 더해가는 캐리어를 꽉 붙들고, 한걸음 한걸음 경사로를 걸어 올라갔다.


도중에 미니밴 한대가 옆에서 속도를 늦추더니 백발의 기사 아저씨가 태워줄까, 물었지만 나는 거절했다. 아침에 트빌리시에서 출발한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고, 쌀쌀한 10월의 산바람이 손을 곱아들게 만드는 이 날씨에, 15kg가 넘는 캐리어를 길바닥에 내던지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는데도, 나는 거절했다. 왠지 오기가 생긴 탓이었다. 신화 앞의 마지막 안전지대처럼 보이는 국경 마을까지 와서, 고작 광장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에 차를 얻어 타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사람보다 동물을 더 많이 만났다. 여전히 호텔은 안 보이고.

나는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씩씩하게 보이려 노력했다. 물론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는 올라가는 내내 대체 마을 꼭대기 가장 후미진 구석에 호텔을 세울 생각을 한 사람이 누구냐고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러나 나중에 그 인물에 대한 내 평가는 반전된다)


1km가 조금 넘는 오르막은 잠시 평지로 이어졌다가 더한 오르막으로 진화하고 다행히 그 뒤로 얼마 안 가 끝났다. 나는 어느새 마을보다는 산에 훨씬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아까 그 광장이 어느새 보이지도 않을 정도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으며,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적갈색의 네모난 건물과 그 세련된 생김새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기가 바로, 룸스 호텔 카즈베기다.


룸스 호텔의 정면은 온통 카즈벡을 향한 제단이고, 출입구는 건물 뒤편이다. 도어맨들이 열어주는 두터운 나무문을 지나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감각에 스며드는 이 호텔의 큰 특징중 하나는 매우 아늑하다는 점이다. 호텔의 바닥과 벽과 천장이 나무 - 그것도 무늬를 넣어 짜맞춘 합판이 아니라 두껍고 표면이 약간 푹신한 진짜 나무다. 목재가 주는 특유의 포용력과 낮은 천장, 소박한 양식은 호텔이라기보다는 산장을 연상시킨다. 푹신한 소파들이 즐비한 로비 라운지에는 책꽂이가 칸막이 대신 놓여 있었다. 꽂혀 있는 책들은 러시아어와 조지아어로 된 소설, 여행서, 예술 관련 서적들이었는데 한가한 투숙객들이 이것저것 꺼내본 덕에 표지가 다들 맨들맨들하게 빛났다. 



비싼 숙박료를 생각하면 대부분 번쩍거리는 샹들리에와 대리석 바닥을 연상하겠지만, 룸스 호텔이 자랑하는 미덕은 다름아닌 이 '소박함'이다. 룸스 호텔은 대자연 속에서 한나절 간의 트레킹이나 스키를 마치고 러시아의 고급 별장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 진중하고 아득한 콘셉트 덕분에, 룸스 호텔에서는 도심 속의 그 수많은 호텔들보다도 훨씬 더 특별한 소박함, 더없이 호화로운 소박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솔직하게 말해야겠지. 

이 소박함은... 관념적인 소박함이며, 룸스 호텔은 ‘험준하고 아름다운 카즈벡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오붓한 별장’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것은 이상적인 목표이자 지향점이지 진짜 정체성이 아니다. 실제로는, 뭐라고 할까. 카즈벡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주변 환경을 완벽하게 차폐하는, 유리 돔. 


호텔은 (그 부지가 속한) 스테판츠민다 마을과 너무나 대조적이라서, 트레킹을 마치고 룸스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아예 다른 차원의 문을 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호텔은 마을과 완전히 분리된, 너무나도 다른 재질과 특성을 지닌 특정 공간이다.



수고스럽겠지만 다시 저 경사를 내려가 스테판츠민다 마을을 한바퀴 느긋하게 돌아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 마을은 대체로 매우 조용하고 낡았다. 가끔 지나가는 차들이 도로의 자갈을 우그러뜨리며 소음을 내지만, 집들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 반 백년간 열리지 않았을 것 같은 녹슨 대문이나 대충 쌓아놓은 돌담 뒤로 갓 빤 빨래들이 펄럭거리는 빨랫대는 일종의 신비감까지 안겨준다.


마을 중앙 주차장 주변에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식당과 슈퍼마켓 등이 있다.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고 접근이 쉽지 않은 내륙의 국경마을이라 그런지 슈퍼마켓은 항상 전쟁이나 재해에 대비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철제 선반에 아무런 포장없이 그대로 쌓여있는 사람 머리통만한 빵들과 무뚝뚝한 맛이 날 것 같은 비스킷과 머핀들, 먼지가 쌓여있는 초콜릿 더미, 바짝 말린 생선 몇 마리가 노끈에 묶여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가게 주인들은 관광객에게 질려버렸는지 그다지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조지아 특유의 환대보다는 러시아의 쌀쌀맞은 냉기가 감돈다. 



그러니 이 낙후한 시골 마을에서, 온 세계의 언어들이 티스푼과 부딪히며 섞여드는 고급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기이한 일이 어디 있으랴. 


게다가 실제로는 호텔 안은 시끄럽다. 매우. 많이. 아침 식사 시간의 적당한 쾌활함은 입맛을 돋우는 정도지만, 오전 10시만 지나면 로비는 온통 관광버스를 기다리는 단체 관광객들과 호텔에 묵지는 않고 공짜로 전망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후가 되면 인스타 모델들이 옷을 갈아입으며 사진을 찍느라 야단스러워진 테라스와 소음을 감추려 더욱 큰 소음이 된 음악으로 인해 라운지는 본래 디자인되었던 기품을 완전히 잃는다.



룸스 호텔의 정말 아름다운 호텔이고, 그 유명한 아침 식사는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아침이었다. 카즈벡을 내다보는 창가 자리에서 커피와 메도빅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오후 내내 책을 읽는 것은 호사로움의 극치였다. 스테판츠민다에 다시 간다면 적어도 하룻밤은 또 묵을 것이다. (예약이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나에겐 어딘가 조금 불편한 구석이 있다. 비싸고 좋은 초콜릿의 뒷맛은 알싸한 쓴맛이듯. 



너무나 험준한 산맥 앞에 세련된 현대성으로 무장한 고급 호텔, 천장이 낮고 어두운 색깔의 로비와 손때묻은 책이 놓인 서재와 도시의 쇳내가 나는 관광객들의 소음, 마을의 낡고 헤지고 후진 모든 것을 무시하는 - 말 그대로 그 존재를 지워버리는 은연중의 태도, 이 격차가 너무나도 커서 기이하다. 그 기이함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온함이 있다.


다들 좋아하는 악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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