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24.
조지아에 도착하기 전 나의 기대를 가장 크게 부풀게 만든 것은 "음식이 맛있다"는 소문이었다. 조지아는 손님 접대와 축제를 매우 중요시하며, 풍성한 식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러시아에 혼자 여행을 다녀온 지인이 조지아에 가는 나를 크게 부러워하기도 했다. 현지 사람에게서 맛집이라고 소개받은 곳이 모두 조지아 식당이었다나. 그러면서 조지아에 가면 '치즈 피자'를 꼭 먹어보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치즈 피자란 바로 하차푸리다.)
조지아의 음식은 소박하면서도 깊이감이 있는 농후한 맛이 특징이다. 겉보기에는 투박해 보이는데, 먹어보면 하나같이 무언가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맛의 혼합을 느낄 수 있다. 이를테면, 바짝 익힌 바베큐의 지글지글한 표면에서 새콤한 과일 향이 감돌고, 처음 먹어보는 스튜의 맛은 희미하게 인도 커리를 연상시킨다.
이 다층적인 맛은 다양한 식재료와 인접한 여러 문화가 층층이 쌓아올린 결과다. 푸쉬킨이 "조지아의 음식은 그 하나하나가 시다"라고 했더던데, 한 접시에
러시아의 영향 탓에 왠지 모르게 척박할 것이란 편견과는 달리 조지아의 식재료는 풍부하다. 주식은 빵과 고기지만 채소와 과일이 놀랄 정도로 많고, 다양한 허브를 아낌없이 쓴다. 매 식탁마다 석류와 호두, 치즈가 빠지지 않고, 꿀과 와인이 넘쳐난다.
(다만 생선 요리만큼은 드문 편이다. 트빌리시의 식당에서도 생선은 잘 찾아볼 수 없고, 스테판츠민다같은 내륙의 산골 마을에서는 슈퍼마켓의 안쪽에 걸린 바짝 마른 황태가 이 세상 어딘가에 어류가 존재함을 막연히 암시해주는 정도다. 그래도 해안 도시에서는 송어나 메기같은 생선을 독창적으로 구워먹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
다음은 그 다양한 음식들 중의, 극히 일부일뿐.
이 만두같이 생긴 조지아 전통 음식은 정말 놀랍지 않게도, 그냥 만두다. 두꺼운 샤오롱바오에 삐죽 솟은 기둥을 달아놓은 모양인데 이 기둥은 손잡이로 힌칼리를 먹을 때는 포크와 나이프를 쓰지 않는 게 '국룰'이란다.
안에는 고기, 버섯, 치즈 등이 들어있고 지역이나 식당에 따라 양파나 감자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안에 가득한 뜨끈뜨끈하고 기름진 육즙이다. 손잡이를 손으로 잡고 한입 베어물어서 쭉 육즙을 들이킨 다음 먹는다.
피가 두껍고 소박한 재료들로 안을 채운 힌칼리는 투박한 인상이 강하다. 관광객용 거리에 세워놓은 메뉴판 스탠드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요리 둘 중에 하나인데(나머지 하나는 하차푸리), 만두에 익숙한 동아시아 사람이라면 사진을 보고 상상하는 그 맛이 거의 맞을 것이다.
조지아의 주식은 '푸리'라고 불리는 빵이다. 인도의 난처럼 화덕에 넣어 굽는데, 길을 걷다가 어디선가 갓 구운 고소한 화덕 빵 냄새를 맡는다면 거리 모퉁이나 반지하에 푸리 가게가 있다는 뜻이다. 마음을 즐겁게 만드는 냄새다. 때로는 주택가에서 60cm는 훌쩍 넘을 듯한 길쭉한 푸리를 종이에 말아 옆구리에 끼고 가는 동네 주민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크기에 가격은 1라리, 한화로 400원이 안된다!)
하차푸리는 푸리 위에 치즈를 얹어 구운 것으로, 길에서 사서 가는 푸리와는 달리 식당에서 먹을 수 있다. 지역에 따라서 모양과 치즈의 종류가 달라지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태양을 실은 배처럼 생긴 아자루리 하차푸리.
하차푸리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는 이전에 쓴 적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빵으로 보는 조지아의 역사와 지리> https://brunch.co.kr/@ingeorgia/21
오자후리는 조지아의 대표적인 가정식 요리로, 양념에 재워둔 고기를 깍둑썰기한 감자, 양파와 함께 볶아낸 요리다. 가정식답게 집집마다 세세한 요리법은 다르지만 맛은 다 비슷하다는 신비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감자의 표면을 약간 튀기듯이 바삭바삭하게 굽는 것이 포인트이며, 조지아식 고춧가루인 '아지카'를 넣어 매콤한 맛을 내는 곳도 있다. 고수잎을 살짝 뿌려 마무리하기도 한다.
소박한 요리라 고급 레스토랑이면 아예 취급하지 않을 때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식당에서 오자후리를 시킬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집밥'을 맛볼 수 있다는 뜻이다.
므츠발디는 조지아식 바베큐 꼬치구이로 돼지, 양, 소고기 등을 꼬챙이에 꿰어 숯을 넣은 그릴에 굽는다. 터키의 케밥, 러시아의 시슬릭과 비슷하다. 기름지고 두툼한 육질과 바짝 튀겨지듯 구워진 껍질을 함께 베어물었을 때 표면의 천일염 알갱이라도 함께 씹히면 눈 앞이 번쩍할 만큼 야만적이고 황홀한 맛이 난다.
타국의 바베큐보다 육질이 부드럽고 몽글몽글하면서 아주 약간 시큼한 맛이 배여 있는데, 이 비밀은 고기를 내기 전 석류즙에 담궈놓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밑작업의 흔적은 므츠발디가 접시에 담겨나올 때 아래에 깔린 동그란 생양파가 살짝 붉은 빛으로 물들어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늘 크림 스튜 위에 기름을 발라 구운 닭을 올리고 도자기 그릇에서 끓여낸 것으로, 단순하지만 결코 맛이 없을 리가 없는 요리다. 친숙한 마늘향과 풍부한 크림의 조화는 입안을 살살 녹인다. 좀 더 섬세한 작품을 내는 가게에서는 매콤한 향신료인 아지카를 뿌려서 내기도 하는데, 아지카의 톡 쏘는 매운 향이 꾸덕한 크림의 뒷맛을 말끔하게 잡는다. 껍질이 바삭한 닭고기를 찢어 접시를 싹싹 긁다보면 어느새 한 그릇은 뚝딱이다.
내가 처음으로 트빌리시에서 먹은 음식이 바로 샤크메루리였다. 장기간의 비행 때문에 온몸이 양초처럼 굳어져 배고픔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냄새를 맡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내가 제대로 찾아왔구나. 맛있는 나라에. 처음 느낀 그 즐거움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모든 샤크메루리는 납작한 도자기 그릇에 담겨 나온다. 조지아 음식을 몇 끼 먹다보면 바닥이 편평하고 2센티에서 4센티 정도 되는 턱이 있는 이 붉은색 그릇이 꽤 친숙해질 것이다. '케시'라고 부르는 조지아 전통 도기다. 여기에 뭘 담아서 굽든 기가 막힌 요리가 되어 나오는 마법의 그릇인데, 케시에 나오는 대표적인 요리가 양송이에 술구니 치즈를 채워 구운 요리-이름은 그냥 ‘케시’다-와, 이 샤크메루리다.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카르쵸에 들어가는 고기는 다양하다. 내가 먹었던 것 중에는 토끼고기 카르쵸도 있었다. 사실상 고기의 종류가 수프의 정체성에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독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육개장같은 생김새와는 달리 카르쵸는 차게 먹는 수프이며 또 놀랍게도 새콤한 맛이 나는데, 이 수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자두다. 고기 수프에 자두가 조금 들어간 게 아니라 자두 퓌레에 고기를 찢어넣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지아의 요리에는 과일이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짭짤한 요리에 과일을 더하다니, 낯설다. 그러나 익숙한 고기와 채소 맛에 과일 하나를 떨어뜨리는 것만으로 예측불가능성이 사방으로 튄다. 어딘가 달달한 냄새에 식욕이 설레고 다른 식재료와 어울려 신선한 미감을 선사하는가 하면, 메스날을 핥는 것 같은 신맛에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산뜻한 뒷마무리가 오래오래 남는다.
조지아를 떠나가 이틀 전 배탈이 난 내게 선택지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조지아 음식은 맛있긴 하지만 유럽답게 매우 진하고 두텁고 무겁다. 여기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닭고기 수프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치키리트마는 닭육수에 계란 노른자와 레몬 커드를 섞은 닭고기 수프다. 뜨거운 육수에 날계란을 골고루 섞는 것은 약간 요령이 필요한 일인데, 고대 페르시아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요리법이라고 한다. 코리앤더와 시나몬, 메리골드 등 이국적인 허브가 많이 쓰이지만 마늘이 들어가 꽤 익숙한 국물 맛이 난다.
가벼운 소화불량에는 꽤 잘 들었다. 여행을 끝내기 싫은 마음을 낫게 해주진 못했지만.
이걸 '콩 수프'라고 설명하면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니다. 로비오는 물은 거의 없고 입안에서 빡빡하게 느껴질 만큼 진하다. 질감은 거의 메주 으깬 것에 가깝다. 그동안 콩이 작고 가벼운 알갱이들이라고 무시했다면, 이제 그 인과응보를 받을 차례다.
로비오를 주문하면 또 도자기 그릇이 등장한다. 특이하게도 로비오는 일반 수프처럼 편평한 접시가 아니라 크기가 작은 장독대처럼 생긴 그릇에 담겨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로비오는 옥수수로 만든 딱딱한 빵인 '므차디( მჭადი)'와 함께 먹는 것이 보통인데, 이 동그란 빵은 평범하게 옆에 놓여있기도 하지만 그릇 위에 뚜껑처럼 그릇 위에 덮여 나오기도 한다.
과일 가게, 노점 가판대, 모퉁이에서 스카프를 머리에 쓴 할머니가 팔고 있거나 ... 하여간 조지아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검붉은색의 울퉁불퉁한 막대기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광경은 어딘가 오싹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순대같은 이것은 무려 '디저트'다.
그 정체는 와인 천지인 조지아에서, 와인을 만들고 남은 포도 껍질과 포도즙으로 만든 간식이다. 포도 껍질과 포도즙을 모아 짜낸 '타타라'에 실로 꿴 호두나 땅콩같은 견과류를 담그고 말린다. 저 올록볼록하고 그로테스크한 모양은 포도즙이 견과류의 모양대로 굳어져서 생긴 결과다.
너무나 이상하게 생긴 나머지 아주 유명한 음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동안 시도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들고 다니면서 뜯어먹어도 되지만, 집에서 총총 썰어서 와인과 함께 먹는 것도 별미다. 마치 양초를 자르는 느낌 - 심지어 안에 실도 있다! - 이라 자르는 순간까지도 이것이 과연 음식이 맞는지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뿐, 실제로 먹어보면 은은한 단맛과 중독적인 식감이 꽤 맛있다.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안에 호두가 든 포도맛 쫀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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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가지 더.
모든 조지아 식당 메뉴판에는 가장 앞쪽에 '토마토 오이 샐러드'가 있다. 어느 식당에서나 꼭 시키는 것이 좋다. 토마토와 오이, 다진 양파에 새콤한 드레싱을 끼얹은 간단한 샐러드지만 다양한 허브가 들어가 무척 풍부한 맛이 나며 입맛을 상큼하게 돋궈준다.
정말 단순하고 간단해 보이는 이 요리가 얼마나 상큼하고 복합적인 맛이 나는지, 아직도 두고두고 미스터리다.
푸쉬킨은 "조지아의 음식은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온천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남긴 것으로 봐서, 그는 이 지역을 꽤나 사랑했던 것 같다.) 이미 뜻을 알고 있는 단어들이 모여 시를 이루면서 전혀 새로운 의미, 어떤 전체적인 인상을 암시하듯 이곳의 음식도 그렇다. 포도, 호두, 석류, 닭고기, 양고기, 양파, 꿀, 치즈 - 전부 이미 아는 것들인데도 여기에선 늘 새로운 맛을 발견하게 된다. 식재료 사이사이에는 다양한 국적과 문화와 지리적 특색이 층층이 쌓여, 이 낯설고 종잡을 수 없는 조합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입 안에서 합쳐졌을 때 드는 것은...
- 축제의 예감.
조지아인들은 축제와 만찬을 좋아한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신이 다른 민족에게 골고루 땅을 나누어주고 쉬고 있을 때 아직 땅이 없었던 조지아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며 노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서 신은 손님으로 등장해 그들과 어울려 즐겼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자신이 가지려고 아껴두었던 마지막 땅을 조지아인들에게 선물해주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오래된 조지아 전통에서는 손님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고, 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을 주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무로 여긴다고 한다. (손님은 굳이 보답으로 땅을 주지 않아도 된다!)
조지아 음식은 확실히 그 신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 겉보기에는 투박해 보이지만 손맛이 있고, 모든 음식이 와인과 잘 어울린다. "이 음식은 뭐예요?"라고 한마디만 물으면, 고대 페르시아부터 이웃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온갖 지명과 역사적 사실이 터져나와 식사 자리를 들뜨게 만드는 음식 그 자체의 풍부한 이야깃거리까지.
무엇보다도 이 도자기 접시 안에는 어떤 먼 옛날, 혹은 어떤 먼 곳에 대한 희미한 인상과 살풋한 예감이 있다. 신이 남겨두었던 마지막 땅에서 대접받는 저녁 만찬에 대한 기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