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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Sep 22. 2020

침묵하는 마을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25.


이번에는 스테판츠민다의 중심지에서 작은 하천을 건너서, 게르니티 트레킹 코스의 입구에 닿을 때까지 15분 정도 지나야 하는 이 작은 마을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테판츠민다는 마트쉬루트카와 관광 버스들이 도착하는 정류장을 중심으로 널찍한 주차장, 호텔, 식당, 슈퍼마켓, 산악 클럽 건물 등이 있는 반면 게르니티에는 납작한 주택 지붕과 돌담뿐이다. 마을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아스팔트 도로는 스테판츠민다에서 다리를 건너와서 게르니티 교회까지 산을 지그재그로 오르다가 교회 앞 주차장에서 끝난다. 멀리서 보면 도로는 관광 센터에서 교회까지 쏘아 올린 줄 달린 화살 같다. 

그러나 덩치가 큰 버스나 효율성을 중시하는 미니밴은 마을 바깥쪽의 공터에서 올라가 중간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정작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뒤돌아 보면, 샤니 산과 스테판츠민다가 보인다.

오전 10시와 고요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 두 가지는 게르니티에서 한 몸처럼 섞여 있었다. 나는 10여 분을 걷는 동안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가끔 도로의 안쪽을 가리키는 게스트 하우스 간판이 나오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편의시설이 많은 스테판츠민다가 아니라 게르니티에 묵을 정도로 열성적인 트레커라면 어제의 긴 산책과 와인 덕분에 늦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조용하다.



무언가 소리가 들리길래 드디어 인기척인가 싶었건만, 고개를 돌리니 세 마리의 분홍색 돼지들이 길쭉한 코를 찡긋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소나 개라면 이제 제법 익숙했지만 돼지는 처음이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컸다. 나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나 돼지들은 서로 몸을 꼭 붙이고 총총걸음으로 걸어 내려와 자기들의 집으로 보이는 울타리 문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앞에 잔뜩 얼어붙어 서 있는 청바지 차림의 여행자가 자못 촌스럽다는 듯이 가볍게 무시하면서.


돼지에게 무시당한 나는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곧 뒤를 이어 하얀 개 한 마리가 다가와 나의 무안함을 달래주었다. 털이 짧고 다리가 긴 개였다. 꼬리가 길었고, 귀는 무척 짧았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조지아의 개들은 사람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면 거부하는 법이 없다. 

하얀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보니 양쪽 귀는 선천적인 장애인지 아니면 어떤 불행한 사고의 결과인지 배꼽처럼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그래서 개의 머리는 사람의 머리통과 비슷하게 둥근 모양이었고 또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 굉장히 사람의 눈과 비슷한 서글픈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개는 나를 한번 힐끗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마을 입구 너머, 시야를 마치 벽처럼 가로막은 산이 있었다. 개는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빛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내가 작별을 고하고 다시 길을 가기 시작하고 나서도 돌아보지 않고 햇빛에 하얗게 떠오르는 길과 그 너머, 갈색 샤니 산의 거대한 주름들을 꿈쩍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신비하기까지 한 과묵한 인상은 내게 게르니티의 인상이 되었다.



게르니티 교회는 조지아에서 단연 가장 유명한 곳이다. 나만 해도, 나를 이곳으로 이끈 것은 그 사진이 아니었던가. 이 교회가 국가의 '정신'을 보관하는 장소 - 전쟁이나 재해 시에는 성 니노의 십자가 등 나라의 제일가는 보물을 보관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이며, 그 자체로도 값진 관광적 자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교회와 그 아래 마을의 소박함은 의아스럽다 못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이다. 싸구려 기념품 가게, 꽃으로 장식된 카페테라스, 관광지라면 마땅히 각오해야 하는 부산스러운 소음과 쓰레기는 어디에 있는지, 게르니티 마을은 오히려 관광객이 오자 한낮의 침묵으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모든 관광의 기쁨과 번거로움은 교회의 주차장과 룸즈 호텔의 테라스에 집결해 있었다)



마을 곳곳에 있는 신축 빌라와 공터에 뼈대를 세우고 있는 공사 현장들은 곧 있을 외부인의 개입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마저도 조용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탕, 탕, 하고 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 나고 잠시 멈췄다가, 인부들 사이에 오가는 짧은 외마디 고함과 대답이 몇 번 들리는 정도였다.  그런 소리쯤은 별 위협이 되지 않는지 도마뱀이 한가롭게 그 앞을 기어 다녔다.


호텔과 로지들이 완성된다면, 드디어 게르니티 전체를 아침 안개처럼 짙게 감싸고 있는 가라앉은 침묵이 끝날까? 길가에는 메뉴판이 늘어서고, 창문이며 지붕이 화려해지고, 길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생길까? 어찌 되든 공사장 소리보다 시끄러워질 것 같기는 하다. 기대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한 미래였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럼 돼지들은 어디로 갈까.

과묵한 하얀 개는, 그때에도 여전히 이 마을에 있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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