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26.
어떤 책은 어떤 장소에서 읽혀야만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토마스 만이다. 단정하고 각이 진 그의 문체는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내면을 그대로 명문화하고 있었다. 이쪽 편에 서서 저쪽 편을 사랑하는, 그 진지함과 불행과 헌신과... 가장 좋아하는 것은 <토니오 크뢰거>.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마의 산>만은 사놓고 책장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놓아둔 지 한 달, 세 달, 일 년이 지나도록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안나 카레니나>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이틀 만에 읽을 만큼 장편 소설에는 익숙한데, 단순히 길이의 문제는 아니었다. 독서가로서 책이 "읽히지 않는다"라고 수동태로 쓰는 것보다 더 비굴한 변명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 눈과 손이 한스 카스트로프가 기차에서 내리는 페이지에서 도통 넘어가질 않았던 건 사실이다. 결국 나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굴복했다고 여기고 <마의 산>을 의식적으로 읽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포기했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힘이, 이번에는 반대로 조지아로 향하는 내게 캐리어에 <마의 산>을 넣어가라고 부추겼다. 정말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독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여행 중에 책을 읽는 습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한 권에 600페이지가 넘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대표작을? 왜?
그러나 그 충동 - 충동이라고 할까, 거의 지령에 가까운 느낌은 기어코 내가 <마의 산> 상권을 가방 한편에 넣게 만들었다.
... 상권만 가져가.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하권은 두고 가. 그래야 돌아올 수 있을 걸.
<마의 산>은 일주일 넘게 계속 캐리어 안에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러나 내가 그 '목소리'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트레킹을 마치고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둑해진 룸즈 호텔의 로비에 내려왔을 때였다.
책 읽기 좋은 때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의 산>을 읽자.
나는 창가의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술술 읽혔다. 한스 카스트로프는 드디어 기차에서 내려 사촌의 병문안을 가고, 그 자신도 갑자기 병에 걸려 기약 없는 요양을 시작했으며, 아름다운 러시아 여인에게 신경을 빼앗겼다....
페이지가 스르륵 넘어갔다. 아니, 파드드득 날아갔다. 한스 카스트로프는 산책을 하고 강연을 듣고 테라스의 침대에 누워 밤하늘을 보았다. 그 사이 창 밖에서는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별이 떴다가...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다시 안개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뿐, 몇 달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나는 그 후로 매일 오전 게르나티 교회까지 트레킹을 다녀온 다음,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서울에선 이 책이 험난한 등반길이었는데, 여기선 마치 스키 슬로프 같다. 힘들이지 않아도 느슨하게 미끄러지며,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경사. 사흘 만에 '하 권에 계속'이 나왔다.
나는 달짝지근한 러시아식 꿀 케이크인 메도빅을 먹으면서 생각에 잠겼다.
<마의 산>의 주인공 한스 카스트로프는 사촌의 병문안을 위해 알프스에 있는 요양원을 찾는데, 며칠 만에 그 자신도 병에 걸려 요양원에 눌러앉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7년을 보낸다. 이 내용의 어디선가 나는 강한 기시감과 동질감을 느꼈는데, 어쩌면 호텔과 요양원이 의외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선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걸 빼면. (아마도.)
사람들. 각국에서 온 사람들. 음악이 흐르는 실내 공간. 각각 무리를 짓는 여러 개의 언어들, 포크와 나이프를 찰그랑거리는 식사 시간의 소음, 베이컨 냄새, 나무 선반의 책들, 창가의 테라스, 차가운 바람, 창 밖의 산.
물론 그 산이 아주 다르긴 했다.
알프스는 날카롭게 깎은 창날처럼 뾰족한 옆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납다기보다는 푸르고 촉촉한 느낌이 드는 산이었다. 알프스를 찍은 사진에서는 대부분 부유함과 여유로움과 활기가 느껴진다. 이슬을 머금고 반짝이는 공기. 그러나 카즈벡은 앞에 두고 요양을 할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니었다. 황량하고 위압적이고, 비구름이 짙게 깔리는 날이면 어디선가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곳에 요양을 하러 온다면 환자를 호랑이 우리 앞에 두는 격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룸즈 호텔에 묵은지 이틀째부터 나도 정말로 조금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어쩐지 더욱 이 책을 읽는데 더욱 도움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어지럽고 식욕이 돌지 않았다. 뜨거운 수프를 먹고 바깥공기를 쐬면 조금 나아졌지만, 호텔로만 돌아오면 가끔 발 밑이 휘청거릴 때가 있었다. 정신은 멀쩡하고 생각은 평소보다도 넘쳐흐르는데 몸 상태만 좋지 않다는 것은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내가 나에게서 점점 빠져나가는 것 같은.
아마도 경미한 고산병이었겠지만, 현기증이 올 때마다 어쩌면 나도 한스 카스트로프처럼 붙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혹은 기대가 찾아왔다. 그래서 몇 년을 사로잡혀 있는 거야. 여기서.
그러나 요양원과 달리 호텔은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 모두들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기 때문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사흘 째에 다시 평지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왜 그동안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지 못했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이다지도 쉽게 읽힌 걸까. 몇 년동안이나 내가 서울에서, 내 방에서, 카페에서, 버스 안에서, 공항 철도와 비행기 안에서도, 트빌리시에서도 읽지 못했던 건 어쩌면 여기에서 읽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내가 여기에 이 책을 데리고 온 건지 이 책은 나를 여기로 끌고 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하권을 가져오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나는 마저 남은 이야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 서울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여기에 눌러앉아 버릴까, 한국과는 6,700km가 떨어진 이 곳에. 그런 부질없는 몽상이 둥둥 떠다니는 내 머릿속에서 <마의 산> 하권은 닻이었다. 그것은 내가 온전히 돌아가야 할 이유였다. 적어도 한 번은.
그때 내가 말했던 그 목소리는 이것까지도 예견했던 것인지 모른다.
한 가지 더. 돌아와서 1년이 지난 지금, 하권은 지금까지도 읽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