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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Oct 26. 2020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세요?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27.


"혼자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해요."라고 말하면, 나오는 대응은 대략 다섯 가지다.

무섭지 않아?

성격 특이하네.

난 외로워서 별로더라.

나도 언젠가 혼자 여행 가보고 싶다.

저도 그래요.


보통 다섯 번째 대답은 가장 드물게 나오기 때문에, 그다지 즐겁지 않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때가 많다. 


'위험'이란 무엇인가. 낯선 나라로 여행을 떠났을 때 맞닥뜨릴 수 있는 안 좋은 상황들. 가볍게는 캣콜링이나 인종차별적 암시에서부터 길 잃기, 바가지, 소매치기, 식중독, 까다로운 행정적 문제... 강도, 살인, 전염병, 비행기 추락.

이러한 일들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사람들은 나에게만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근거 없는 낙관을 가지거나 아예 그런 위험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피해버리면서 출발한다. 그걸 무책임하다고 여길 순 없다. 모두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교통사고를 예상하지는 않지 않는가. 실제로 비행기 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횡단보도에서 차에 치일 확률이 몇 만 배나 높은데도.

강도나 살인 등의 강력 범죄 역시, 지역에 따라 크게 다르지만 꼭 관광객이라 더 당하는 것은 아니다. 성범죄나 살인 사건의 절반이 지인 사이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통계나 확률을 제시해봤자 '혼자 여행 가는 사람'이 놀랍도록 무모해 보이는 효과는 가시지 않는다. 마치 생리 중에 상어 떼가 가득한 바다에 뛰어드는 것처럼, '혼자'라는 점이 때마침 고장 날 준비가 된 비행기와 뇌물을 받아먹는 국경 관리인과 교활한 소매치기와 비열한 사기꾼과 썩고 맛없는 음식 쓰레기와 어두컴컴한 골목과 이상성욕자와 장기매매꾼을 끌어들이는 자석이라도 되는 듯이.


여행자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것은 동행 유무가 아니라 정신머리의 유무다. 치안이 불안정한 지역에 가지 않기, 소지품 꼭 챙기기, 술 많이 마시지 않기, 타인에게 지나치게 경계를 풀지 않기. 호신술 치고는 재미가 없지만 이 정도면 항공 사고를 제외하고는 대충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혼자라면 무섭다'라는 공포의 방점은 '혼자'에 있다. 그저 혼자라는 이유로 무서워지는 것이다. 혼자, 낯선 곳에, 혼자.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어렸을 때부터 닭장 같은 아파트와 학교에서 자라 도축장 같은 지하철에 매일 실려 다니게 된 관성인지, 어둠과 고독을 범죄자들의 경계까지 끈질기게 내쫓은 휘황찬란한 현대 도시의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인간 본성인데 그 두려움의 장막을 찢어버리고 기어코 혼자 낯선 곳을 보아야겠다는 괴짜들이 문제인 건지.


"나도 혼자 여행 가봤는데, 외로워서 별로더라."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조금 깊은 곳까지 들어가 본 대담함과 안전한 곳으로 돌아왔다는 현명함을 고루 갖춘 자신에 대해, 어딘지 모르게 우쭐한 어조로.


'외로움'의 어원을 찾아보면, 하나를 뜻하는 '외'와 그러함, 그럴만함의 뜻을 더하고 형용사로 만드는 접미사 '-롭다'가 붙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혼자이면 마땅히 그럴 상태.

이 외로움은 긍정적인 감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교류하도록 부추기는 진화적  기제(존 카시오포)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무능력(에밀 뒤르켐)으로도 여겨진다. 특히 집단적인 생활 방식이 익숙한 사회에서는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여행을 가고, 스스로 "외롭다"라고 인식하는 것이 본인의 사회적 능력이 없는,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못 받는 찌꺼기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당사자가 주눅을 드는 일이 많다. 이러한 사상적 제반이 갖추어진 환경에서 양육된 대부분의 사람이 혼자 여행 가기를 꺼리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들은 어딜 가서 무엇을 보든, 동행했었을 수도 있는 타인의 유령 같은 그림자를 본다. 우리 엄마가 좋아했을 텐데. 다음에는 친구랑 와야지. 아니면 적어도 사진을 찍어서 SNS에 공유한다. 나 여기 있어, 다들 나를 봐줘. 어디에 있든 눈앞이 아니라 저 뒤에 있는 타인과의 소통과 교류가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있지 않은 풍경은 빈약하고 희미한 인상을 남아있다가 곧 사라진다.


그러나 모든 것이 둘 이상이어야만 의미가 있는가? 이 세상이 그렇게 서로를 위하도록 설계되어 있단 말인가? 이국적이고 놀라운 풍경, 아름다운 예술 작품, 낯선 바람과 나뭇잎 소리, 파도 위를 달리는 서핑, 맛있는 음식... 혼자서, 혼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온전한 집중력과 섬세한 감각으로 이 모든 것을 인식하고 감상하고 즐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혼자 여행 다니는 것의 장점은 발이 아프다고 찡찡거리거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는 동행자가 없는 편안함 그 너머에 있다. 혼자서 모든 결정과 감상과 책임을 고스란히 껴안기 때문에, 혼자 다니는 여행자의 사고 속도와 결단력, 감각의 예민함은 단체 관광객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으로 유지된다. 외로움은 감각과 사고의 날을 벼린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이야기하느라 그 어깨 너머로 흐릿하게 사라져버린 모든 배경들이 생생하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담벼락 뒤에 숨어있던 고양이의 꼬리를 발견하고, 발길따라 걷다가 포도 덩굴 아래에 있는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 창문 밖에 걸려있는 빨랫줄의 집게가 무지갯빛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것, 스스로의 발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것. 그것이 혼자 여행하는 자의 특권이다.

그 대가로 배는 빠르게 피곤해지고, 자신의 넘쳐나는 생생한 감각과 사고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저 외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뿐이겠지만.

따라서 홀로 여행을 가는 것의 우선적인 목표는 여행에서 오는 외부적 자극을 모두, 온전하게, 독창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혹은 적어도 그럴 준비와 각오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혼자 여행'이 가능하기도 하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필요 이상으로 외롭지 않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앞서 언급한 다섯 가지 대답 중 네 번째, "부럽다"는 반응이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가장 애매하다. 내게 이렇게 말한 사람들 중 일부는 정말 언젠가는 시도해볼 사람이었던 반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소 비굴한, "악기 배우고 싶다"나 "나도 진상에게 멋지게 일침을 놓는 사이다 발언을 해보고 싶다"라고 말할 때와 같은 표정을 짓는 - 즉,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형은 혼자 가는 여행을 설득시키는 것이 가장 힘든 대상이다. 이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후다. 갈 사람은 가고, 안 갈 사람은 안 간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은 취향을 이해받을 수 있는 확률이 크게 낮기 때문에, 다섯 번째 대답을 들으면 상대에게 큰 애착을 가지게 된다. 나만 알고 싶었던 조그만 카페가 돌연 사람들로 북적이는 것을 보았을 때의 불쾌감이나 실망과는 약간 다르다. 혼자 여행한다는 것은 나만 간직하고 싶은 수줍고 완고한 취향이라기보다는, 불굴의 탐험감과 비슷하다. 그래서 비슷한 경향의 동료를 만날 때의 기쁨은 새벽 바다에서 두 배가 마주치며 인사할 하는 반가움과 닮았다. 내가 들은 머나먼 안개 고동 소리를 누군가도 함께 들었음을 확인하는 것.

그래서 신기하게도, '혼자'를 좋아하는 둘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오래도록 떠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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