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11.
하차푸리(Khachapuri, ხაჭაპური)는 치즈를 얹어 화덕에 구운 납작하고 동그란 조지아의 전통 빵이다. 조지아의 어느 식당에 가도 볼 수 있는 기본 메뉴로, 크기도 맛도 대체적으로 레귤러 사이즈의 치즈 피자와 비슷하다.
하차푸리는 지역마다 특색 있는 변형을 보여주는데, 이름은 낯설고 종류가 너무 많아서 헷갈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하차푸리의 분류에 대한 명료한 안내는 여행 가이드북이나 요리책이 아닌 조지아의 역사, 지리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이메루리 하차푸리(Imeretian/Imeruli Khachapuri)는 이메레티 주의 것으로, 납작한 빵 두 개 사이에 치즈를 넣어 구운 일종의 플랫 브레드다.
이메레티 주는 조지아의 서부 중앙부, 리오니 강의 상류에 위치해 있다. 저 편평하고 푹신한 하차푸리만큼이나 비옥한 농경지대다. 15세기에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메레티 왕국이 독립적으로 존재했다. 조지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자 한때 조지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그다음에는 이메레티 왕국의 수도였던, 쿠타이시가 이 지방에 있다.
메그루리 하차푸리(Megrelian/Megrul khachapuri)는 이메루리 하차푸리의 위에 치즈를 한 겹 더 얹어 굽는다. 그렇다. 더블 치즈 피자다!
메그루리 하차푸리는 밍그렐리아(혹은 사메그렐로)에서 왔다. 현재의 행정 관할 구역 구분으로는 사메그렐로-제모-스바네티주에 속하지만, 밍그렐리아는 언어적으로도 인종적으로 구분되며 16세기부터 수백 년 간 독립적인 밍그렐리아 공국으로 존재했던 지역이다. 또한, 밍그렐리아인들은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하는 '황금 양털의 나라' 콜키스 왕국의 후예다.
이 지역은 조지아의 특산 치즈인 술구니 치즈의 원산지이기도 한데, 메그루리 하차푸리의 위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기름진 유백색의 두꺼운 치즈와 양털을 결부시키면 이 빵의 기원지를 잊어버릴 리는 없다.
하차푸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아자루리 하차푸리(Adjarian/Adjaruli Khachapuri)다. 아자라 자치공화국에서 온 이 하차푸리는 동그란 반죽의 양쪽을 잡아 길게 늘인 보트 모양의 빵 위에 치즈를 잔뜩 실어 구운 다음, 그 한가운데에 계란 노른자와 버터 한 조각을 올려 완성한다.
배를 연상시키는 생김새와 넘실대는 치즈 위에 밝은 해처럼 빛나는 노른자. 아자라가 흑해 연안의 남쪽 지방이며 이 빵을 만든 사람들이 선원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측 가능하다. 조지아 제2의 도시이자 번화한 항구인 바투미가 이 아자라의 수도다.
구루리 하차푸리는 사실 하차푸리라고는 거의 불리지 않는다. 일단 기본 재료는 같지만 모양이 확연히 다르다. 반들반들한 초승달 모양의 빵 안에 치즈와 삶은 계란이 들어있는데, 이탈리아 요리인 깔조네와 비슷하다. 구루리 하차푸리는 일부 음식점에서 특이한 종류의 하차푸리로 소개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냥 '구리안 파이'라고 불리며, 기원지인 구리아 주에서는 '크리스마스 파이'라고 부른다. 조지아의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인데, 정교회에서는 이날을 예수의 탄생일로 보기 때문이다.
구리아 주는 위의 모든 밍그렐리아, 이메레티, 아자라의 사이에 납작하게 낑겨있는 작은 주다. 주변에 있는 지역들이 화려한 역사적 존재감을 자랑하는 사이에 구리아 주에는 크게 이름난 도시나 관광지는 없다. 그렇지만 이 지역의 이름, '구리아'는 그 자체로 상당히 인상적이다. 밍그렐리아어로 '구리'란 '심장'을 뜻한다. 13세기 조지아 왕국 시절, 구리아가 정말 딱 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라자냐처럼 층을 겹겹이 쌓은 아치마 하차푸리(압하지아), 감자가 들어가는 오스리 하차푸리(오세티아), 치즈에 밀가루를 섞은 스바누리 하차푸리(스바네티주)나 반죽을 보자기처럼 접은 라추리(라차주) 하차푸리 등 마이너한 버전도 있다.
하차푸리 앞에 붙는 지명은 모두 최소 500년은 된 오래된 이름들이다.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통일 조지아 왕국은 짧은 전성기 후에 동쪽의 카헤티 왕국,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한 카르틀리 왕국, 이메레티 왕국 등 3개의 왕국과 밍그렐리아, 스바네티, 구리아 공국 등 여러 공국으로 쪼개졌다. 카헤티와 카르틀리를 제외하면 이젠 아주 익숙한 이름들이지 않은가.
그후로 아주 오랫동안 조지아는 느슨한 문화적 배경과 통일 조지아 왕국 시절의 아름답고 짧은 전성기만을 공통으로 간직한 채 조각조각 나뉘어 있었다.
하차푸리 국가들이 다시 모인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후, 조지아가 독립한 1991년이다.
트빌리시의 음식점 메뉴판에서는 언제나 최소 두 가지 이상의 하차푸리를 볼 수 있다. 수도의 특권이랄까. 대체로 이메루리와 아자루리 하차푸리가 기본적이다. 빵 자체도 큼직하고 치즈가 정말 아낌없이 들어있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혼자서 다 먹기는 힘들다. 혼자 앉아서 하차푸리를 시켰다면 다른 메인 디쉬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하차푸리 하나만으로도 부족함은 없다.
화덕에서 갓 나온 하차푸리에서는 짙은 밀가루 냄새가 온기에 실려 온 몸의 신경을 이완시킨다. 빵 위에서 갈색 반점을 터뜨리며 부글부글 끓는 치즈를 보면 침샘에서 식욕이 솟구쳐 오른다. 얼른 따끈따끈한 조각을 집어 들자. (아자루리 하차푸리의 경우 사진을 찍고, 포크로 노른자를 깨서 살짝 휘젓는 전희의 시간이 추가되지만)
한 입 물면 아찔한 짠맛과 풍부한 볼륨감이 입 안으로 밀려온다. 정말 대단히 짜다는 점은 미리 경고해두겠다. 하지만 정말 맛있다. 모든 조지아 음식이 대체로 그렇듯이. 주재료가 밀가루와 계란과 버터와 치즈니, 근본적으로 치즈피자가 맞다. 여태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치즈 피자를 떠올려보라.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더한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