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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 Mar 30. 2020

사랑의 도시에는 장미가 없다

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12.


트빌리시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는 카헤티 지역의 작은 마을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라 불린다. 다녀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이 이름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인구가 1500명이 채 되지 않는, 삼단 케이크 위의 집 모형같은 이곳을 '도시'라고 불러야 마땅한지는 둘째치고 그 앞의 단어가 말이다. 사랑의.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오히려 그 근거는 아주 명확하게 추적할 수 있다. 어떤 이름이 실재의 성격과 특징을 반영한다는 언어학적 관점에 따라 이 사랑의 도시를 탐사해 보면, 그 유래 혹은 적어도 작명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모호한 단서 몇 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시그나기는 작지만 아주 예쁘장한 마을이다. 마을의 광장에서 성벽으로 내려가기 전, 갈림길의 난간에 잠시 멈춰서면 이 지역에서 나는 모든 포도주의 색깔을 띤 지붕들과 견고한 벽돌담, 그 사이를 빼곡하게 채우는 과일 나무들, 저멀리 삐죽 솟은 교회의 종탑과 길쭉하게 솟아오른 짙푸른 사이프러스로 장식된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그리고 그너머로는 초록색과 갈색의 네모난 조각들로 엮어 만든 카헤티의 거대한 카페트가 깔려 있고, 띄엄띄엄 위치한 작은 마을들이 상아색과 와인색의 비정형적 문양을 수놓고 있다. 사방의 지평선은 옅푸른 코카서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맥의 높이가 고르고 윤곽이 둥글어서 마치 커피를 담아둔 머그컵의 테처럼 보인다.


시그나기를 찍은 대부분의 사진이 비슷한 구도이긴 해도, 평균적인 미인들이 뻔하단 소리를 들지만 언제나 환영받듯이 예쁘긴 예쁘다.



시그나기가 사랑의 도시를 자처하는 두번째 이유는, 여기에서는 아무 때나 결혼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광장의 결혼등록소에서 혼인 신고를 처리하고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업무를 24시간 무휴로 처리한다.


이 행정적인 조치가 시그나기에 오는 커플들이 갑작스레 느끼는 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충동을 처리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것을 부추기기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많은 연인들과 신혼 부부가 시그나기에 많이 오는 것은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첫번째 이유와 합쳐져 날씨가 좋은 날 시그나기의 성벽에서는 종종 결혼 화보 촬영을 볼 수 있다.


니코 피로스마니


세번째, 그리고 가장 유력한 근원으로 추정되는 이유는 시그나기가 조지아의 국민 화가인 니코 피로스마니의 고향(근처)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고향은 근처에 있는 미르자니지만, 좀 더 크고 번화한 시그나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피로스마니는 다소 어둡고, 투박하며서도 강인한 조지아의 진정을 화폭에 녹여낸 화가다. 애석하게도 국외에서는 그의 작품보다는 그를 모티프로 삼은 후대의 노래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 피로스마니는 어떤 프랑스 여배우와 사랑에 빠져 가진 재산을 모두 털어 그녀를 위해 호텔을 장미꽃으로 가득 채웠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그리 성공한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많은 장미는 삶의 대가였을 것이다. 피로스마니는 가난과 병으로 죽었다.

이 일화를 모티프로 만들어진 곡이,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백만 송이 장미>다.


* 참고를 위해 놓아두고 가는 링크
한국어판: https://youtu.be/ESe8Ya7LAOM (심수봉)
                 https://youtu.be/PYEu9gZQU8Q (호피폴라)
러시아어판: https://youtu.be/ESe8Ya7LAOM (알라 푸가초바)


시그나기에는 니코 피로스마니의 생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박물관에 그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사돈의 팔촌 이름을 인맥으로 써먹는 느낌이긴 해도, 이 화가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마을 전체에 은근한 단내를 풍기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그나기에는 장미가 없다.


<백만 송이 장미>와 '사랑의 도시'라는 이름에서 사방에 장미가 쏟아지듯 피어있고 섬세한 덩쿨 장식이 되어 있는 흰 의자, 고급스러운 초콜릿 상자 탑 따위를 상상하고 시그나기를 찾아온다면 다소 당황할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했다면 파리로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사실 파리도 파리보단 못하지만.


시그나기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고 사진 찍기 좋은 풍경 포인트를 몇 군데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낡고 너무 작고 별다른 장식이 없는 마을이다. 혼인 신고서를 작성할 상대를 챙겨오지 않은 여행자라면 낡은 성벽을 좀 따라 걷고, 박물관에 잠깐 들러 피로스마니의 그림 몇 점을 둘러보다가, 와인 한 잔 마시고... 자, 이제 트빌리시로 돌아갈까.


이 나무 계단을 한발 밟았을 때의 느낌은 정말이지 내 인생의 앞날보다도 불안정했다


무엇보다 괴리감을 심화시키는 것은 관광 상품으로 팔아먹겠다는 욕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별명에 비해 허술한 내용물의 상태다. 시그나기에는 오래되고 소박한 마을이 갑자기 손님을 맞게 되었을 때 보이는 허둥거림과 촌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성벽은 거의 제대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고, 탑 위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은 어찌나 위태로운지 네 발로 기어 올라가서 엉덩이로 내려와야 한다. 광장 한가운데를 시끄럽게 가로지르는 관광용 사륜 오토바이와 철저하게 외지인을 위한 기념품만 진열된 가판대는 조금 보기 민망한 구석까지 있다.


...이렇게 쓰니, 너무 가혹한 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그나기에 가려고 했던 여행자가 이 글을 보고 그 생각을 접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시그나기는 괜찮은 곳인데.



조지아가 그다지 컬러풀한 곳은 아니지만, 시그나기는 그 중에서 가장 생기넘치는 색깔을 지닌 도시에 속할 것이다. 광장 바닥에 줄맞춰 놓인 알록달록한 털 슬리퍼들과 상아색 뿔을 깎아만든 술잔, 황금빛 벌집이 통째로 든 꿀병, 검붉은 순대나 올록볼록한 양초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콤한 포도쫀드기인 츄르츠헬라가 줄줄이 늘어선 노점상. 관광으로 발달한 수도의 근교 도시답게 묘하게 생활감이 적어 시그나기의 조그만 중심부를 거닐고 있으면 낡은 놀이공원에 들어온 것같은 느낌이 든다.



중세 성문을 지나 성벽으로 내려가는 작은 상점가에는 오래된 건물을 타일처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카페트들이 단순한 하늘의 색깔과 놀라운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늘에 모여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가게 주인들, 연석에 주저앉아 스케치북에 중세 성벽을 그리느라 정신없던 미술학도, 배를 보이며 발라당 누워있는 개와 쫑쫑거리며 풀숲으로 사라지는 병아리들.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성벽은 고작 1km 정도이고 앞서 말했다시피 삐꺽거리는 철제 계단과 판자로 불안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불안감을 이기고 나아갈 만 하다. 성벽에서 내다보는 카헤티 지역은 와인의 특산지이자 비옥한 농경지라는 사실을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쑥쑥 자라는 활발한 생기가 넘치는 땅이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식욕과 정신을 살찌우는 듯 하다.



시그나기에는 특출난 레스토랑은 없지만 조지아의 특산인 앰버 와인은 아주 짜릿하고, 햇살이 나른하게 들어오는 창가 자리가 매력적이던 카페의 레몬 파이는 정말로 맛있었다. (그리고 어찌나 크던지!)


나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트빌리시에서 1시간을 달려와 맑고 따뜻한 10월의 반나절을 보낸 것. 과장된 광고 문구를 읽고 섣불리 기대했었던 것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했다.

 

ㅡ그러니까, 사랑의 도시란 이름을 붙이면 안됐다. 시그나기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언제나 뒤이어 나오는 그 꼬리표에 가슴이 아플 지경이 되었다. 상자 크기에 맞지 않는 포장지는 버석거리고, 눈 아래에 살풋 찍한 갈색 애교점이 서툰 분칠에 가려 사려졌다.

사랑이 없어도 괜찮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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