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 13.
아빠는 오래된 진공관 앰프를 매우 아꼈다. 주말 아침이면 우리집 거실에서는 피아졸라의 탱고나 쇼팽의 야상곡이 들려오곤 했다. 아빠는 좋아하는 음악은 분명했지만 장르는 크게 가리지 않고 그저 그 진공관과 앰프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리로 거실을 가득 채우는 것을 즐겼다.
그 중 자주 듣게 된 곡이 <백만 송이 장미>다. 내 조지아 여행 계획을 들은 아빠는 이 노래의 주인공이 조지아의 화가라면서 매일매일 들려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심수봉이 부른 번안곡이 유명하지만 아빠가 트는 것은 언제나 러시아어 버전이었다. 아빠가 좋아하는 것은 그 가사였기 때문에.
일단 잠시 이 곡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원곡은 1980년대 라트비아의 가요다. 제목도 <마라가 딸에게 준 삶>으로 완전히 다른 노래다. 이후 러시아의 가수인 알라 푸가초바가 이 곡의 멜로디에 러시아어로 된 다른 가사를 붙여서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백만 송이 장미>. 이 곡은 가난한 화가가 한 여배우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위해 셀수도 없이 많은 장미를 사서 그녀가 머물던 호텔의 정원을 가득 채웠다는 아름다운 가사로 유명해졌다. 이 가사 속 주인공이 바로, 조지아의 대표적인 국민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다.
이 러시아판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져서 곡은 다른 나라에서 이 버전을 기반으로 리메이크되었는데 한국의 <백만 송이 장미> 는 가사가 많이 달라져서 원래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 참고를 위해 놓아두고 가는 링크
한국어판: https://youtu.be/ESe8Ya7LAOM (심수봉)
https://youtu.be/PYEu9gZQU8Q (호피폴라)
이 밴드가 탄생하는 것부터 보아왔으므로, 개인적으로 이 버전을 좋아한다.
러시아어판: https://youtu.be/ESe8Ya7LAOM
러시아어판의 가사는 이렇다.
한 화가가 있었네
집 한 채에 외로이 사는 그는
여배우를 사랑했으니,
그녀는 꽃을 무척 사랑했지
화가는 자신의 집을 팔고
자신의 그림과 피를 팔아
그 돈으로 바다만큼의 장미꽃을 샀네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붉은 장미를
창가에서, 창가에서, 창가에서 그대는 보겠지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사랑에 빠진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그대를 위해
꽃과 바꿔버린 것을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붉은 장미를
아침에 그대가 창문 앞에 서 있으면 정신이 이상해질지도 몰라
마치 아직 꿈인 것처럼 광장이 꽃으로 넘쳐날 테니까
정신을 차리면 궁금해 하겠지
어떤 부호가 여기다 꽃을 두었을까
창 밑에는 가난한 화가가 숨도 멈춘 채 서있는데
만남은 너무 짧았고 밤이 되자 기차가 그녀를 멀리 데려가 버렸지
하지만 그녀의 인생에는 넋을 빼앗길 듯한
장미의 노래가 함께 했다네
화가는 혼자서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에도 꽃으로 가득찬 광장이 함께 했다네
현실주의자인 우리 엄마는 "그렇게 많은 꽃을, 쓸데도 없이"라고 핵심을 찔렀다. 그러나 눈과 콧대는 엄마를 닮았어도 내용물은 아빠 편인 나는 역시 그 가사가 마음에 들었다.
쓸데도 없는 꽃, 쓸데가 없어서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쓸데가 있는 사랑이 사랑인가. 어떤 목적도 실용성도 없이, 그저 그녀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집을, 돈을, 인생을 꽃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야말로 어떤 감정의 궁극적인 형태가 아닐까.
그리고 그토록 많은 꽃, 바다만큼의 꽃. 그렇게 많이 살 필요가 없고, 주인공의 재력과 삶의 균형을 생각해봤을 때 그렇게 사서도 안되는, 너무 많은 꽃. 한 송이였어도 사랑을 표현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꽃이 이렇게 많아지면 그것은 좀 더 다른 것, 사랑이되 사랑만은 아닌 더 크고 깊고 광대한 무언가로 변한다. 쓸데가 없으나, 그 쓸데없음으로서 온전해지는 무언가로.
나는 그 비현실적이고 다소 극단적인 충동과 자기 파멸에 이르는 순수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내가 아빠와 비슷하긴 해도 명백하게 다른 점은 이런 부분이다. 내가 좀 더 우울하고, 어두운 것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호텔 안뜰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붉은 장미를 보며 숭고한 사랑에 감명을 느끼기보다도 그 파괴적인 인력, 한 인간의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심지어는 그것을 부서뜨리기까지 하는 강렬한 힘에 감탄하는 유형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가사의 모티프가 된 사람은 조지아의 대표 화가인 니코 피로스마니(ნიკო ფიროსმანი, 1862-1918)다.
자료를 뒤져보니 이 일화는 유명세에 비해 그 사실성 여부가 모호하다. 프랑스 여배우와 연인 사이였고 그녀를 그린 그림이 <여배우 마가렛> 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피로스마니가 호텔이나 저택을 장미로 가득 채웠다는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어쨌든, 나는 이 바보같은 화가를 만나기 위해 조지아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