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조지아에 있었을 때 -14.
트빌리시의 국립 미술관에서 피로스마니의 작품이 빙 둘러진 전시관 안에 들어섰을 때, 나는 기묘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 그림 배경은 대부분 검은색이거나 혈색이 하나도 없는 파란색 혹은 누런기가 도는 녹색이었고, 붓질은 숨이 막힐 정도로 짙고 투박했다. 어둡다. 그것이 첫인상이었다.
사람들은 큼직하고 단순하게 그려져 있었다. 대부분 조지아의 전통 의상이나 일할 때의 복장(어부, 요리사 등)을 입고 있었는데 어정쩡한 포즈와 애매한 표정은 어딘가 중세 유럽의 종교화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 짙은 반달형 눈썹과 무표정한 그 눈들은 어찌나 검고 뚜렷한지, 그림 앞에서 눈을 감아도 보일 지경이었다.
배경이 너무 어둡고 눈썹이며 옷 색깔이 보통 유화에 잘 쓰이지 않는 새까만 색인 것이 신경 쓰여서 찾아봤는데 피로스마니는 흰 캔버스가 아니라 검은 유포에 직접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렇다. 묘하게 사람을 압도하는 저 어둠은 무슨 색을 덧칠해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바탕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이었다. 미술관의 새하얀 벽은 이 그림들의 어둠이, 단순히 저 새까만 물감이 아니라 그림 자체가 억누르고 있는 어둠이 빠져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피로스마니는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난했다. 그는 다른 일을 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는데, 트빌리시의 소박한 가게나 여관에 그림을 그려주었다. 재료비 때문에 물감을 직접 만들어서 썼고 그마저도 모자라서 칠하다 만 틈새 사이사이로 바탕 천의 색깔이 드러나 그림의 가장자리를 새카맣게 태웠다. 그러나 저 인상적인 검은색이 가난의 표시라고만 보기는 힘들다. 뭔가 있다.
말하자면.... 야성이라고 할까.
그 야성은 자연스럽게 앙리 루소를 떠올리게 했다. 정답 처리받을 수 있는 대답이다. 피로스마니 역시 루소처럼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고 대표적인 나이브 아트 화가로 분류되니까.
소박함, 원시성, 선명한 색깔과 단조로운 구도, 평면성.
하지만 앙리 루소의 그 정글, 나무줄기가 어지럽게 얽혀있고 꽃과 길쭉한 나뭇잎이 가득한 정글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피로스마니의 그림에도 생명력이 넘치지만 그 생명력은 나무를 자라게 하거나 꽃을 피우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종류의 것이라고 할까.
앙리 루소가 조미료 없이 직접 불에 구운 스테이크(와 그 옆에 풍성하게 가득한 곁들임 채소)를 냈다면, 니코 피로스마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정을 거쳐 납작하게 눌린 거대한 육포를 내놓은 것 같다.
어쨌든 이 투박하고 어두운 그림들을 전시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다소 감흥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화폭에 장미만 한가득 그려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좀 더 강렬하거나 눈에 띄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다는 것에 실망했다. 그래도 미술사학을 배웠던 사람으로서 피로스마니가 원초주의로 분류되며 끊임없이 전쟁을 겪어온 조지아의 상황과 소박한 국민성을 꾸밈없이 드러내 어쩌구저쩌구 하는 설명은 대충 이해했다.
그러나 만남은 끝이 아니었다. 피로스마니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미술관 밖까지 나를 따라왔다. 나는 그 후로 계속 그에 대한 생각에 시달리게 되었다.
시장 한 구석에 커다란 달리아와 백합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앞에 두고 있는 어느 할머니의 어딘가 슬프기도 하고 묘하게 무기력해 보이면서도 부리부리한 눈빛을 마주쳤을 때. 혹은 노란빛으로 억눌린 녹색의 평원을 보면서, 텁텁할 정도로 진한 콩 수프를 먹으면서.
나는 매번 "아, 어디서 봤는데."라고 중얼거렸고, 그 기시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상당히 애를 썼다. 그러다 알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게 피로스마니의 그림이었다는 것을.
피로스마니가 그린 백 년 전의 조지아와 지금의 조지아는 다르지만, 그리 크게 다르진 않다. 건물의 모양이나 도시의 발전상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솔직히 그걸 포함해서도 그리 많이 다르지 않지만) 이건 사람들의 눈과 평원의 모양과 텁텁하면서도 가끔 오싹하게 만드는 공기질,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트빌리시의 소박한 식당 구석 자리에서 뭘 먹거나, 마르쉬루트카를 타고 지나가면서 녹황색 들판과 검은 산들을 관찰하거나, 낡은 시골 마을의 교회에 앉아있을 때 느낀 것과 피로스마니의 그림을 보았을 때 받은 인상이 똑같았다.
피로스마니는 한 나라를, 한 지역을,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미묘한 특징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이것이 '자국의 소박한 국민성과 일상생활을 묘사한 조지아 대표 화가의 작품'이란 말인가? 전시 도록과 위키피디아가 써놓은 이 뻔하디 뻔한 문구가 사실을 넘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한동안 멍해졌다.
그리고 다시 장미에 대해 생각했다.
<백만 송이 장미> 속 그 낭만적인 일화와 니코 피로스마니의 작품을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실제로 장미로 가득 찬 호텔이 있었네 없었네 보다도 더 명확해 보이는 증거는 바로 그의 그림이다. 이렇게 어둡고 투박하고 못 배워서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 세계적으로 손꼽히게 로맨틱한 일을 했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미술관에서 나 역시 상당히 냉소적이었다. 피로스마니의 작품이 뛰어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아니 땐 굴뚝에 난 스캔들 기사처럼 서로 별 관련도 없는 유명한 화가와 그럴듯한 이야기가 붙여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로스마니에 대해서 진짜로 알게 되었을 때, 그가 얼마나 소박하고, 단순하고, 더없이 솔직하고, 그림의 뒤를 들춰보았을 때 거기엔 그림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진실함을 가지고 있는지 느끼게 되었을 때 나는 생각을 고쳤다.
그런 사람이기에 백만 송이 장미를 사지 않았을까.
아니 오히려 백만 송이 장미를 사는 것은 그런 사람밖에 없다, 고.
설령 여배우를 위해 호텔을 장미로 가득 채웠다는 일화가 누군가가 지어낸 것이라도, 그 사실 여부를 둘째치고 곳곳에서 마케팅에 써먹고 있더라도 상관이 없다. 그 모든 게 상관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오히려 '백만 송이 장미 일화'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어떤 가난하고 진실하고 괴로워하는 화가가 있었는데, 그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사랑의 형태가 있음을.
이 글을 쓰면서 게오르기 쉥겔레이아의 영화 <피로스마니(1969)>를 보게 되었다. (쉥겔레이아 감독은 불과 얼마 전 세상을 떴다. 고인의 명복을.)
선명한 색깔과 검은 그림자, 요란한 문양과 황량한 풍경이 공존하는 조지아 특유의 분위기와 피로스마니의 생애를 잘 담고 있다. 소련 시절 영화인 데다 조지아어여서 조악한 영어 자막만으로는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런데도 꽤 재밌다 싶더니, 국제 영화제에서도 인정받은 명작이라고 한다. 보고 나면 피로스마니란 화가를 연민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