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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쓰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야.

에세이 #24

by 토파즈

설날이 지나갔습니다. 명절에 가족이 모이면 두 배로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여기저기 눈치 보며 누구도 마음이 힘들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디 제가 애를 쓴다고 섭섭하고 마음 상할 일이 줄어들겠습니까? 누구는 마음이 상하고 누구는 섭섭하고 또 누구는 그저 즐겁게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갑니다.


대체로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간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합니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느끼지 못하겠지만. 가족 간의 불화는 내가 언제 그랬냐 와 네가 그때 그랬잖아로 시작되고 뇌라는 녀석이 가진 기억의 오류가 싸움을 더 크게 합니다.


조심스레 인류가 암을 정복하고 생명연장에 성공해도 가족 간의 애증이 얽힌 관계는 풀지 못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물론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이 끝나고 집에 아내와 둘이 남았습니다. 딸은 잠깐 혼자 몰입해서 옷을 헤집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내는 물었습니다.


가족들이 모이면 왜 그렇게 유독 용을 쓰는 거야?
뭐, 내 딴에는 분위기도 좋게 좋게 기분도 좋게 좋게 해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면 좋잖아.
당신은 그렇게 흥분해서 말을 하다 보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은 스타일이거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응, 그건 그렇지. 그래도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야.


용쓰지 않아도 좋은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인 거 가족들이 다 알아.
그러니깐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헉. 나도 모르게 위로가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과연 가족들이 그렇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마음의 위로가 먼저이기에 그 생각은 멀리 보내버렸습니다.


가족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용을 쓰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면 많이 먹으며 헛헛한 몸과 마음을 채웠습니다. 명절이 끝나고 나면 며칠간 약간 멍한 상태에서 보냈는데 몸도 물론이지만 마음이 지친 겁니다. 용쓰느라.


이번에도 그러고 있었는데 방에서 아내가 경고 아닌 경고를 했습니다. '말이 많다고. 실수한다고. 조심하라고.' 그런데 여느 명절보다 수월하게 지나갔습니다. 마음이 그다지 지치지 않은 것을 보니.


아내의 유혹보다 아내의 경고가 무서운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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